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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43
한자 楊州趙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윤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75년(선조 8) - 조존외 출생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92년(선조 25) - 조계원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646년(인조 24) - 조존외 사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670년(현종 11) - 조계원 사망
입향 시기/일시 1600년 전후 - 조존외 입향 추정
입향 시기/일시 1600년대 중후반 - 조계원 입향 추정
입향 시기/일시 1920년경 - 조원희 입향 추정
분관|분종 시기/일시 1600년대 중후반 - 조계원 충정공파
본관 양주조씨 본관 - 경기도 양주시
입향지 양주조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문주리 지도보기|전동면 송정리지도보기|전의면 원성리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양주조씨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문주리 지도보기|전동면 송정리지도보기|전의면 원성리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조계현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정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조원희 선대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문주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양주조씨 삼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원성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조계원 묘소와 신도비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정리 상소골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독송정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정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조잠
입향 시조 조존외|조계원|조원희

[정의]

조잠을 시조로 하고 조존외, 조계원, 조원희를 각각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연원]

시조 조잠(趙岑)은 고려 때 양주호장(楊州戶長)을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다.

조잠의 증손대에 이르러 조계생(趙啓生)을 파조로 하는 정평공파(靖平公派), 조유중(趙惟中)를 파조로 하는 강화공파(江華公派), 조말생(趙末生)을 파조로 하는 문강공파((文剛公派), 조종생(趙從生)를 파조로 하는 제학공파(提學公派) 등으로 분파되었다. 특히 문강공파는 조선 중기 이후 번성하였으며, 세종특별자치시의 양주조씨는 대부분 문강공파 후손이다.

[입향 경위]

전의면 원성리 입향조는 문강공파 조존외(趙存畏)[1576~1646]로, 광해군 때 성균관에서 재직하였다. 옛 양주군 마석 일대[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서 살다가 상소 사건에 연루되어 어머니 안동김씨를 모시고 외가인 전의 지역으로 낙향한 것으로 전하여진다.

전동면 송정리 입향조는 조계원(趙啓遠)[1592~1670]으로, 공조참판·동지의금부사·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조계원송정리의 풍수가 좋아서 눈여겨보았으며, 맏아들 조진석(趙晋錫)이 일찍 죽자 상소골에 묘를 썼다. 또한 후손들은 조계원의 묘도 상소골에 잡게 되었고, 이후 조계원을 파조로 하는 충정공파(忠靖公派)를 형성하였다.

연동면 문주리 양주조씨는 후손에 의하면 경기도 양주에 있던 선대의 묘역에 고종이 죽자 홍릉을 조성하게 되어 연동면 문주리로 옮겨 오면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문강공파 21세손 조원희(趙元熙)가 일가를 이루었다.

[현황]

양주조씨연동면 문주리에는 1988년 7가구, 전의면 원성리에는 1997년 4가구, 전동면 송정리에는 2011년에는 3가구가 각각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연기군양주조씨는 1985년에는 43가구 150명, 2000년에는 36가구 101명이다. 2015년 세종특별자치시의 양주조씨는 1,870명이다.

[관련 유적]

효행으로 이름난 조수빈(趙秀彬)[1745~1824]·조명빈(趙命彬)[1749~1832] 형제와 조수빈의 종손인 조백규(趙百逵)[1764~1816]의 처 경주김씨(慶州金氏)[1764~1816]의 행적을 기리는 양주조씨 삼효 정려전의면 원성리에 있다. 양주조씨 삼효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조계원의 묘역과 1680년대에 건립된 조계원의 신도비가 전동면 송정리 상소골 마을 뒷산에 있다. 또한 조계원의 아들 조사석(趙師錫)[1632~1693]이 만년에 독송정(獨松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독송정은 지금 흔적만 남아 있다. 송정리라는 지명도 독송정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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