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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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州趙氏三孝旌閭 |
이칭/별칭 | 양주조씨 삼쌍효열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원성리 5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건립 시기/일시 | 1854년경 - 양주조씨 삼효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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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0년 - 양주조씨 삼효 정려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5월 31일 - 양주조씨 삼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31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양주조씨 삼효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1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양주조씨 삼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31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양주조씨 삼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원성리 50 |
원소재지 | 양주조씨 삼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원성리 50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양주조씨 문중 |
관리자 | 양주조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1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원성리에 있는 양주조씨 3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개설]
양주조씨 삼효 정려는 양주조씨 조수빈(趙秀彬)[1745~1824]과 조명빈(趙命彬)[1749~1832] 형제, 조수빈과 조명빈의 팔촌인 조만빈(趙萬彬)의 손부 조백규(趙百逵) 처 경주김씨(慶州金氏)[1764~1816]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다.
조수빈은 조말생(趙末生)의 12세손이자 조태연(趙泰衍)의 아들이다. 자는 사종(士宗), 호는 애권당(愛勸堂)이다. 연기군 전의면 원성리에서 태어났다. 연기 지역의 양주조씨는 조말생의 8세손인 조존외(趙存畏)[1576~1646]를 입향조로 하면서 주로 전동면 송정리에 세거하였다. 조존외의 어머니가 안동김씨 김사수(金師秀)[효자 김사준의 형]의 딸인 것으로 미루어 외가를 연고로 경기도 광주에서 연기 지역에 온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호서읍지』 「전의현」 성씨조에는 우거성씨(寓居姓氏)[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 때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에 속하는 천안군 지역에서 300년이 채 못 되게 거주한 성씨]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에 저명가문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효성이 지극하던 조수빈은 1824년 80세를 일기로 죽었다. 『충청도읍지』 「전의현」 인물조에 의하면 조수빈의 효행에 대한 포장 상신은 고을에서 7번, 향교의 천거로 8번 있었다고 한다. 집의 당호(堂號) ‘애근(愛勤)’도 그런 연유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하였다. 한 집안에서 3형제가 함께 살면서 효를 다한다 하여 칭송받았다. 시묘처에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가 찬한 유허비가 있다.
조수빈의 동생 조명빈은 자가 성천(性天), 호는 국포(菊圃)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화하고 머리가 총명하였으며,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는 정훈(庭訓)[가정의 교훈]을 익혀 효성이 뛰어났다고 한다. 미호(美湖) 김원행(金元行)과 강재 송치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心性善惡』이라는 책자를 저술하여 유림에게 강의하기도 하였다. 1762년 가을 모친이 병에 걸리자 형 수빈과 함께 약을 구하여 효행을 다했다. 『전성지』 효행조에는 모친이 병에 걸렸을 때 손가락을 잘라 먹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친이 돌아가신 뒤에는 3년간 형과 함께 정성으로 시묘를 하였다고 한다.
한편 열부 경주김씨는 김상종(金相宗)의 딸이자 조수빈의 종손인 조백규의 처로, 남편과 더불어 시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함은 물론 남편을 공대하였다고 한다. 남편이 병을 얻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지만 회생하지 못하고 상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빈소를 마련하고 염습한 후 직접 마름질하여 상복을 지어 입고 스스로 목을 매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
[위치]
전의면 소재지에서 691번 지방도로를 타고 공주 정안면 쪽으로 약 500m를 가면 도로 오른쪽에 원성리(元省里) 대뿌리 마을이 나온다. 양주조씨 삼효 정려는 대뿌리 마을 입구의 논[양주조씨 종중 답] 가운데에 동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변천]
세 효열 중 가장 먼저 명정을 받은 이는 경주김씨이다. 경주김씨는 병으로 먼저 간 남편을 따라 자결한 열녀로, 1832년에 명정을 받아 그해에 정려를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다음은 조수빈이다. 『연기군지』에 따르면 조수빈은 1762년 7세 때 모친이 병에 걸리자 동생 조명빈과 함께 눈 덮인 산을 뒤져 약초를 구해 와 모친의 병을 고쳤다. 모친이 90 가까운 노령으로 사망하자 3년을 시묘하였다고 한다. 『전성지』 효행조와『연기지』 효자조에서는 모친이 병을 얻었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회생시켰으며, 모친이 89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자 수빈이 60살의 늙은 몸에도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효자로 죽은 지 18년 지난 1842년(현종 8)에 명정을 받았다.
조수빈의 동생 조명빈은 1854년(철종 5)에 명정을 받았다. 현재의 삼쌍 정려는 이 시기에 합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60년경에 중수되었다.
[형태]
정려는 방형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세웠다. 하방은 시멘트로 고막이를 하였다. 화강석재를 이용한 방형의 고주초석을 세우고 원주를 올렸으며, 홑처마에 맞배지붕 형식을 하고 있다. 정려의 4면은 모두 홍살을 돌려 마무리하였으며, 내부의 각 칸과 칸 사이에도 홍살을 돌려 구분해 놓았다.
정려의 양 옆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시설해 놓았다. 1988년경에 단청을 하였다. 현재 정려 주변으로는 아무런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논과 밭 사이에 건물이 있어서 주변이 협소하다.
[현황]
정려의 중앙 상단부에 ‘孝烈門’이라는 현판을 최근에 달았고, 정려 안에는 3개의 명정현판이 걸려 있다.
왼쪽에는 조수빈이 1842년에 명정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현판[孝子 學生趙秀彬之門 上之八年 壬寅 九月日 命旌, 160×40㎝]이 있고, 중간에는 조명빈이 1854년에 명정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현판[孝子 學生趙命彬之門 上之五年 十一月日 命旌 翌年 乙卯 二月建, 160×40㎝]이 있다. 오른쪽에는 조백규의 처 경주김씨가 1832년에 명정을 받았음을 적은 현판[烈女 贈朝奉大夫童蒙敎官 趙百逵之妻 贈令人 慶州金氏之門, 上之三十三年 壬辰 九月 日 建 命旌, 140×40㎝]이 있다.
양주조씨 삼효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1832년 조백규의 처 경주김씨가 열녀명정을 받고 1842년 조수빈과 1854년 동생 조명빈이 각각 효자명정을 받는 등 19세기 양주조씨 문중에서 지속적으로 정려가 건립된 것으로 보아 당시 지역에서 양주조씨의 위상이 높았음을 가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