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25 |
---|---|
한자 | 解仇-叛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고대/삼국시대/백제 |
집필자 | 임재수 |
[정의]
478년 백제의 권신이었던 해구가 일으킨 반란.
[개설]
웅진 천도 후인 서기 476년에 해구는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올랐다. 477년에는 문주왕이 사냥을 나간 것을 틈타 왕을 시해하였다. 그리고는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을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옹립하고, 정권을 자기 마음대로 하였다. 이렇게 정권을 좌지우지하던 해구는 478년에 은솔(恩率) 연신(燕信)과 더불어 대두산성(大豆山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덕솔(德率) 진로(眞老)가 거느린 정예병 500명의 공격을 받아 죽고, 난에 가담했던 연신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역사적 배경]
한성 함락 후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는데, 그에 따라 왕권은 미약해졌다. 대신 해씨나 진씨와 같은 백제의 귀족들이 권력을 쥐고 정국을 좌지우지 하였다. 특히 해구는 병관좌평에 오른 것을 계기로 정권을 자기 마음대로 하였다. 진씨가 견제에 나서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해구가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
병관좌평이 되어 국정을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던 해구는 연신과 더불어 예산에 있다고 생각되는 대두산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진남이 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다시 진로가 500명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공격하여 마침내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결과]
해구는 죽고 해구의 반란에 가담하였던 은솔 연신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연신의 처자들은 웅진의 시장에서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에 처형되었다.
[의의와 평가]
해구의 반란은 웅진 천도 후 백제 사회 내부적으로 생겨난 문제들이 밖으로 표출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은 해씨에서 진씨로 넘어가게 되었고, 진씨의 도움을 받은 동성왕과 무령왕이 즉위함으로써 웅진 천도 후의 혼란은 종식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