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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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霞谷集 |
영어음역 | Hagokjip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준호 |
성격 | 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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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 | 정제두|정후일|심육|윤순|이진병|정술인|신대우|정문승|정계섭|신작 |
저자 | 정제두 |
편자 | 정문승|심육|윤순|이진병|정계섭|신작 |
편찬연도/일시 | 1822년|1856년[22책본]|1930~1935년[11책본] |
간행연도/일시 | 1856년[22책본]|1930~1935년[11책본] |
책수 | 22책|11책|10책|8책본 |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국립중앙도서관|성균관대학교 도서관 |
소장처 주소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 56-1[관악로 1]|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산 60-1[반포대로 201]|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53[성균관로 25-2] |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안산 지역에 은거했던 정제두의 문집.
[개설]
정제두(鄭齊斗)[1649~1736]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이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양명학자이자 강화학파의 시조이다. 정제두는 비록 서울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어려서부터[적어도 5세 이후부터] 안산에서 살았으며, 40대 후반 안산 추곡(楸谷)으로 들어온 후 나이 60세 때까지 이곳에 묻혀 학문을 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편집 과정은 전후 5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처음 정제두가 죽은 지 5년 뒤, 아들 정후일(鄭厚一)과 문인 심육(沈錥) 및 윤순(尹淳), 이진병(李震炳) 등이 편집을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그 뒤 정제두의 증손 정술인(鄭述仁)이 신대우(申大羽)에게 위촉해 다시 추진하였으나 신대우의 죽음으로 역시 중단되었다가 40~50년 뒤인 1856년(철종 7) 현손 정문승(鄭文昇)이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필사본은 22책본, 11책본, 10책본, 8책본 등 여러 이본이 있는데 이 가운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22책본이 바로 이때의 것을 초(抄)한 정서본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11책본은 7세손인 정계섭(鄭啓燮)이 1822년(순조 22) 신대우의 아들 신작(申綽)이 편집한 것을 저본으로 1930~1935년 사이에 간행한 것이다. 이들 이본들은 체재가 서로 다르고 내용도 서로 중첩되거나 일관성이 없으나 그 중 22책본이 가장 내용이 풍부하다.
[서지적 상황]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22책본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을 광복 후 문화재 반환 때 되찾아온 것으로, 정문승의 발문이 실려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는 11책본에는 신작과 정계섭의 발문이 있으나 10책본과 8책본에는 발문이 없다. 그러나 22책본에 빠져 있는 연주(筵奏)와 헌의(獻議) 및 집록(集錄)이 11책본과 10책본에 들어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본서의 저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22책본이다.
[구성/내용]
현전 필사본 중에서 원형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22책본은 정집(正集)·부집(附集)·내집(內集)·외집(外集)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집에는 서(書)·소(疏)·제문·애사·묘표·묘갈·묘지명·행장·유사(遺事)·시·서(序)·기(記)·설(說)·발(跋)·잡저·학변(學辯)·존언(存言)이, 부집에는 연보·행장·묘표·유사·내문(柰文)·제문·문인어록(門人語錄)·주(奏)·계(啓)·서첩 등이 수록되어 있다.
내집에는 「중용해(中庸解)」·「대학해(大學解)」·「논어해(論語解)」·「맹자해(孟子解)」·「시차록(詩箚錄)」·「정성서해(定性書解)」·「통서해(通書解)」·「시송(詩誦)」·「심체송(心體誦)」·「경학집록(經學集錄)」·「심경집의(心經集義)」·「경의(經儀)」·「당우기년(唐虞紀年)」·「주무성강연표(周武成康年表)」·「부자기년(夫子紀年)」·「사맹기세(思孟紀世)」가 수록되어 있다.
외집에는 「하락역상(河洛易象)」·「선원경학통고(璇元經學通考)」·「기삼백설(朞三百說)」·「천지방위이도설(天地方位里度說)」·「칠요우행설(七曜右行說)」·「조석설(潮汐說)」·차록(箚錄)·서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정집은 저자의 문집이고, 부집은 부록이다.
내집은 사서삼경 등 주로 경학에 관한 저술을 모았고, 외집은 역학이나 천문·지리와 같은 경세적 성격의 저술을 모았다. 정집에 수록된 방대한 양의 서(書)는 사우 간에 학술 문제를 논변한 내용이다. 양명학적 도학사상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최석정(崔錫鼎)·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민이승(閔以升) 등과의 왕복 편지에 그의 양명학의 이론 체계가 잘 나타나 있다. 그 밖에 예설 및 경세에 관한 내용도 다수 있다. 「학변」은 독립적인 저술로서, 정주학(程朱學)의 이원론적 학문 방법과 지리하고 번잡한 학문 태도를 비판했으며, 양명학적 관점에서 자신의 일원론적인 심성론을 요약하고 있다.
「존언」 3편은 왕수인(王守仁)의 『전습록(傳習錄)』3편에 필적하는 그의 주저(主著)이다. 「학변」에서 제시한 방향을 자세히 체계화한 것으로, 「학변」과 함께 조선시대 유일의 양명학 이론서라 할 수 있다. 부집은 부록으로, 하곡 연보는 신작이, 하곡 행장은 심육이, 그리고 묘표는 신대우가 각각 찬하였다.
내집에는 주로 사서삼경에 대한 독립적 저술들이 수록되었다. 「중용해」와 「대학해」는 각각 9편 1도(圖)로 이루어져 있다. 「논어해」에는 77조, 「맹자해」에는 20편의 해설을 특히 심성론과 관계된 내용을 중심으로 중점 수록하였다. 「심경집의」에서는 『심경』 전체를 도심(道心)의 경(經)과 위인(爲人)의 학(學)으로 파악, 신독설(愼獨說)에 바탕한 유일(唯一)·정일(精一)·간약(簡約)의 학으로 집약하였다. 「정성서해」는 『정성서(定性書)』를 10조로 나눈 후 자신의 의견이나 해석을 주기(註記)한 것이다.
「통서해」에서는 『통서』의 조목을 성상(誠上)·성하(誠下)·성기덕(誠幾德)·성(聖) 등 4조로 나누어 풀이하고 있다. 「시송」에서는 사서삼경과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 등의 설을 끌어와 『시경』의 여러 편을 부연하였다. 「심체송」은 심체(心體)에 관한 6절에 걸친 해설이다. 「시차록」에서는 『시경』13편의 쟁점에 관해 논했고, 「서차록」은 『서경』의 여러 논점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춘추차록」에서도 9개 항에 걸쳐 자신의 의견을 논술하였다.
「경학집록」은 성현과 유학자들의 경전 요지와 경훈(經訓)의 요점을 상·중·하로 나누어 집록한 것이다. 「경의」는 젊어서부터 저자가 경구(警句)로 삼았던 성현들의 격언을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다. 「당우기년」은 『서경』 「요전(堯典)」과 「순전(舜典)」 및 「대우모(大禹謨)」를 근거로 요(堯)·순(舜)·우(禹)의 정치적 공적을 사적으로 전개하고, 그 생졸 연수를 추산한 글이다.
「우서기년」은 요·순·우의 섭정과 선위(禪位) 및 생졸 관계를 역사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부자기년」은 춘추삼전(春秋三傳)과 『사기(史記)』 등을 참조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73년에 걸친 공자의 활동상과 시대 배경을 서술한 것이다. 모두 그의 경서에 대한 폭넓고 세심한 관심과 몰두가 잘 나타나 있다.
외집의 「하락역상」은 복희팔괘차서도(伏羲八卦次序圖)를 비롯해 하도(河圖)·낙서(洛書)의 상수론(象數論)을 도시하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선원경학통고」는 천문과 역상에 관한 모순점을 지적, 설명한 것이며, 22책본에만 수록되어 있는 「차록」은 그의 경세론을 총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정제두가 우리나라 양명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듯이, 『하곡집』은 한국 양명학 연구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이다. 1973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