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6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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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壽鳳 |
영어음역 | Yi Subong |
이칭/별칭 | 의숙(儀叔),화천(花川),안산십오학사(安山十五學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명우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의숙(儀叔), 호는 화천(花川).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이경익(李景翼)이다.
[활동사항]
이수봉은 현재의 경기도 안산시에서 태어났다. 1733년(영조 9) 진사가 되었고, 1740년(영조 16) 문과에 급제한 뒤 지평, 정언, 장령, 헌납, 사간, 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재직 시 평안병사 이일제(李日躋)가 성을 쌓을 때 백성들한테 재물을 거두어들여 사사로이 사용했다하여 탄핵하였고, 주연(冑筵)과 세손의 강학 때에 산림(山林)의 선비를 초청하여 출입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1757년(영조 39) 예천군에서 미심쩍은 소송이 있자 경상도안핵어사(慶尙道按覈御史)로 파견되어 조사를 하였고, 이어 역모사건이 일어난 제주도의 민심을 달래고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추천으로 제주위유어사(濟州慰諭御史)로 부임하였다. 역적의 잔당들이 다시 난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수십 인을 죽임으로써 남살(濫殺)의 혐의를 입었으나 혐의가 풀려 승지로 발탁되고 곧 강계부사(江界府使)에 제수되었다.
강계부사로 있으면서 삼(蔘)의 폐단을 지적하고, 은점(銀店)에서 받아들이는 세금을 호조에 납부하는 대신 강계 백성들이 삼을 무역하는 데 보태주어 민폐를 없앨 것을 청하여 시행하였다. 1767년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73년 대사간이 되었는데 조영순(趙榮順)의 죄를 청하는 합계를 정지하였다가 삭직당하고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지만 두 달 만에 석방되어 곧바로 승지로 임명되었다. 1778년 공조참의로 재직 중에는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을 합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안산 지역에서 함께 교유한 이용휴(李用休), 이광환(李匡煥), 유경종(柳慶種), 강세황(姜世晃), 조중보(趙重普), 임희성(任希聖), 최인우(崔仁祐), 유중림(柳重臨), 엄경응(嚴慶膺), 허필(許佖), 안정복(安鼎福), 목만중(睦萬中), 채제공(蔡濟恭), 신택권(申宅權), 신광수(申光洙) 등과 안산십오학사(安山十五學士)로 불렸는데 이수봉은 ‘시냇가 날아오르는 백로(白鷺)’로 평하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