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7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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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光洙 |
영어음역 | Sin Gwangsu |
이칭/별칭 | 성연(聖淵),석북(石北),오악산인(五嶽山人),안산십오학사(安山十五學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연(聖淵), 호는 석북(石北)·오악산인(五嶽山人).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신호(申澔), 어머니는 이휘(李徽)의 딸, 처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윤두서(尹斗緖)의 딸이다.
[활동사항]
신광수는 문장으로 뛰어난 강박(姜樸)과 학행과 시문으로 잘 알려진 이덕주(李德冑)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가문이 남인인 때문에 초년부터 관직 진출이 쉽지 않아 향리에 머물며 시작에 힘쓰면서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1750년(영조 26)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60년 영릉참봉(寧陵參奉)이 되었다. 그 뒤 선공감봉사, 돈녕부주부, 연천현감(漣川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1770년 제주도에 갔다가 그곳에 머물며 『탐라록(耽羅錄)』을 지었다. 1772년 기로과(耆老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승지로 발탁되었는데, 이때 승지에 제수된 4인이 모두 기로과 출신이어서 국왕이 ‘사호각(四皓閣)’이라는 편액을 써서 승정원에 걸도록 하였다. 영조가 신광수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고 집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이후 영월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775년 승정원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학문과 사상]
신광수는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특히 과시(科詩)에 능하여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는 창으로도 널리 불리었다. 신광수는 당시의 모순된 사회상을 사실적인 필치로 고발하려 노력하였기 때문에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횡포, 이에 고통 받는 민중들의 삶, 농촌의 피폐상 등을 작품의 소재로 채택하였다. 또 ‘해동의 백낙천(白樂天)[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자 정치가]’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로 시문에 뛰어났으며, 당시의 현실이나 우리나라의 신화나 역사를 소재로 하여 민요풍의 한시를 창작하여 한국 한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신광수는 주로 남인계 명사들과 교류하였는데, 청장년기에는 채제공(蔡濟恭), 이헌경(李獻慶) 등과 만년에는 홍한보(洪翰輔), 정범조(丁範祖) 등과 교류하였다. 함께 교유한 이용휴(李用休), 엄경응(嚴慶膺), 이광환(李匡煥), 유경종(柳慶種), 강세황(姜世晃), 조중보(趙重普), 이수봉(李壽鳳), 최인우(崔仁祐), 유중림(柳重臨), 허필(許佖), 임희성(任希聖), 안정복(安鼎福), 목만중(睦萬中), 채제공, 신택권(申宅權) 등과 ‘안산십오학사(安山十五學士)’로 불렸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는 『석북집(石北集)』이 있다. 이 『석북집』은 앞서 신우상(申禹相) 등이 편찬한 16권 8책을 신광수의 5세손인 신관휴(申觀休)가 1906년(고종 43) 활자로 간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