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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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淳七 |
영어음역 | Hong Sunchi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정진각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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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
성별 | 남 |
생년 | 1877년 |
몰년 | 1932년 |
[정의]
일제강점기 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홍순칠은 1877년(고종 14)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에서 출생하여 1932년 사망하였다. 현재 안산시 단원구 와동체육공원에 기념비가 있다.
[활동사항]
홍순칠은 1919년 3월 29일 시흥군 수암면 와리에서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주민을 규합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다음날인 3월 30일 비립동에 집결하기로 하여 주민들에게 통고한 결과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홍순칠은 윤병소(尹秉昭)·윤동욱(尹東旭)·유익수(柳益秀)·김병권(金秉權)·이봉문(李奉文) 등과 함께 대열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시위 군중들이 독립 만세를 따라 외치며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와 공자묘를 돌면서 시위를 했는데, 홍순칠은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홍순칠은 당시 거주 지역인 와리(瓦里)[지금의 안산시 단원구 와동]의 농민들에게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된다.”라며 농민들을 설득하여 참여하도록 하였다. 당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중심 과제였던 국유지 창출 과정에서 농민들이 제일 큰 피해자였으며, 이에 따라 독립이 이루어지면 토지 분배라고 하는 농민적 이해에 기초한 독립국가 건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나마 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상훈과 추모]
1992년에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