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070 |
---|---|
한자 | 浦口 |
영어공식명칭 | Harbor |
이칭/별칭 | 나루,항구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지훈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배가 드나드는 항구.
[개설]
충청남도 아산시에는 곡교천과 삽교천 등의 하천이 발달해 있으며 아산만으로 연결된다. 아산시 하천들의 하천변과 아산만 연변에는 포구가 발달해 있었다. 곡교천에 발달하였던 포구는 인주면 해암리의 해암나루, 걸매리와 밀두리의 나루말, 신창면 신곡리의 여무시나루터, 염치읍 송곡리의 송곡나루터 등이 있다. 삽교천에 발달하였던 포구는 선장면 궁평리의 선장포, 나루터, 돈포리의 돈곶 등이 있으며, 아산호 연변에 발달했던 포구는 둔포면 신남리의 신흥포, 남창, 영인면 백석포리의 백석포, 인주면 공세리의 공세곶 등이 있다.
충청남도 아산시의 대표적인 포구로는 선장포, 둔포, 백석포, 밀두리 등이며 이들은 과거 중요한 어촌이었다. 그러나 아산만방조제, 삽교천방조제의 건설과 임해 지역 개발 등 주변 환경의 변화로 과거 어촌으로서의 기능을 대부분 잃었다. 특히 선장포구는 아산만 일대에서 조선 후기에 포구로 크게 번성했던 곳이나, 개항 이후 해운 수운 교통이 쇠퇴하고 해만이 간척되면서 포구 기능을 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포구의 역할]
충청남도 아산시 포구는 상품 유통의 한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 간 정보와 쇄신의 소통로이기도 하였다. 포구를 매개로 상류와 하류 간 지역 문화를 지리적으로 통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오랫동안 포구가 주변 사람들에게 폭넓게 사용되면서 포구 유역은 문화 등질 지역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주로 도하(渡河)의 기능을 담당하는 나루[津]에서 상업적 기능이 강화된 포구[浦]로 점차 확대되어 갔다. 조선 후기 예산장은 충청남도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꼽혔는데, 평야 지대여서 물산이 풍부했다는 점 외에 아산만과 삽교천에 발달한 중소형 포구 마을 때문에 원격지 유통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쉬웠기 때문이었다. 삽교천에는 선장포를 비롯하여 대포, 장포, 가리포, 단지포 등이 포구 마을로 존재했다.
’창(倉)’은 옛날에 세금이나 진상품을 받아들일 때 곡물과 같은 현물세를 일시 보관하는 일종의 창고를 말한다. 이 창고에 보관된 현물 세곡을 선박을 통하여 한양으로 옮기는 제도를 조운(漕運)이라 하며, 이런 창고를 특히 조창(漕倉)이라 한다. 조운은 조전(漕轉), 해조(海漕) 등으로 불린다. 이때 해안가에 있어 해상 운송을 맡은 조창을 해운창(海運倉), 하천변에 있는 강상 운송을 맡은 조창을 수운창(水運倉)이라 한다. 옛날에는 육상 교통의 발달이 미약하고 도로가 거의 없어서 강이나 바다를 이용해서 이런 세곡을 실어 날랐다. 이런 창이 설치되어 있던 곳에는 하천이나 바다나 예외 없이 포구가 발달하였다.
과거 조선 중기 16세기를 전후해서 영인산의 북쪽 바닷가인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공세창(貢稅倉)을 설치하고, 바다와 가까운 충청도 근해 여러 고을의 조세를 거두어서 매년 배에 실어 서울로 날랐으므로 이 호수를 ‘공세호(貢稅湖)’라 불렀다. 지금의 공세리성당 자리가 공세미를 쌓아 두던 곳이다. 이곳은 본래부터 생선과 소금이 넉넉했는데, 창을 설치한 후부터는 백성들과 장사꾼이 많이 모여들어 부유한 집이 많았다.
[포구의 변화]
충청남도 아산시 선장포구는 개항 이후 대체로 세 단계의 변화를 겪어 왔다. 먼저 개항 이후 선장포구는 주로 예당평야의 쌀을 인천이나 군산으로 실어가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경남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그 역할의 상당 부분을 선장역으로 빼앗겼다. 쌀 수출이 끊기면서 선장포구에는 어선들만이 드나들었다. 이때 어선들은 연안이나 연평도에서 어업을 하였다. 1950년대 6·25전쟁 이후 특히 1960년대 선장포구는 소금 수합장으로 다시 크게 번성하였다. 태안과 서산에서 생산된 소금이 선장포구로 실려 와서 선장역으로 운반되어 충남 내륙지방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실려 갔다.
이러한 선장포구의 역할은 1970년대 말 삽교천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끝났다. 삽교천방조제가 축조되기 전까지 삽교천과 무한천 하류에는 상당한 범위의 간석지[개펄]가 있었다. 둔전이나 궁방전 관련 지명이 다수 분포한다는 점을 보면 이 지역의 경지 개간은 조선 시기부터 계속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해안 저지가 대규모로 개간된 것이 일제강점기부터임을 고려할 때 선장포구 일대를 중심으로 한 삽교천 하류의 경지 개간은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하여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삽교천방조제 건설 이후 선장포구는 상업이 쇠퇴하고 삽교호의 풍부한 농업용수를 이용함으로써 논농사가 쉽게 되었고 포구에서 농촌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아산만에 연한 포구들이 일부 개발되었는데, 백석포가 대표적이다. 백석포는 1894년 시작된 청일전쟁으로 청나라 군대가 이곳에 상륙하여 영인산을 중심으로 아산군 일대에 진을 쳤다. 백석포는 일제강점기에 외부 지역과의 물품 수출입 적환지(積換地)[운송수단이 바뀌는 지점]로서 아산 지역 도시 성장에 일부 기여했으나, 광복 이후 쇠퇴하여 거의 폐촌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