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0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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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貢津 |
영어공식명칭 | Gong-jin |
이칭/별칭 | 공세포,공세곶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병조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아산만 연안에 있던 포구.
[개설]
공진(貢津)은 조선시대 전기부터 충청도 일대의 세곡을 수합하여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내륙 수로의 요충지였다. 공진의 위치는 안성천과 삽교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며 입암산[206.1m] 줄기가 해안 쪽으로 돌출된 곶이[바다 가운데로 내민 땅]로 포구가 입지하기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 설치되었던 공세곶창은 조선 전기 전국 9개 조창 가운데 하나로 『경국대전』에 수록되어 있을 만큼 규모가 컸다.
공세곶창은 조선 중기에 전성기를 이루었고 40여 개 고을을 관장하며 조운선 60여 척이 정박하였는데, 오늘날의 충청남도와 충청북도 청주 일대를 포괄하는 넓은 범위를 관할하였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에는 거의 대부분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국가 통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던 포구였다. 1631년(인조 9)에 성을 쌓아 창고를 방비하였는데, 『1872년 군현지도』「아산현」에는 ‘공세지곡성(貢稅地穀城)’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여지도』[18세기]와 『광여도』[19세기 초]에는 성 내부의 건물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변천]
공진은 조선시대 내내 충청도 일대에서 갹출한 세곡의 집산과 반출을 담당했던 중요한 포구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지토선(地土船)이 세곡의 운반을 담당하고, 산간 지역에서는 면포(綿布)로 조세를 납부하게 되면서 조창과 조운의 기능이 축소되었고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따라 공진의 기능도 축소되었다. 결국 고종 때 조창이 폐지되면서 포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 공세창이 폐지되면서 1895년 공세리성당이 들어섰고 퇴적과 간척으로 포구의 기능을 점차 상실하였다. 포구 주변 간척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진행되어 일제강점기에는 하천 연안 지역이 대부분 개간되어 경지로 이용되었다.
[현황]
공진의 포구가 있던 곳은 모두 간척되어 경지로 이용되고, 창고가 있던 자리는 현재 공세리 마을이며 공세리 마을 북쪽 동산에 공세리성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