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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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臥牛里遺蹟 |
영어공식명칭 | Remains in Wau-ri |
이칭/별칭 | 아산 와우리유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와우리 1-4 |
시대 |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이판섭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8년 12월~1999년 8월 - 충청문화재연구원 와우리유적 발굴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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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재지 | 와우리유적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와우리 1-4 |
성격 | 복합 유적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와우리에 있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적.
[개설]
1998년 12월부터 1999년 8월에 걸쳐 충청매장문화재연구원[현재 충청문화재연구원] 주관으로 국도 34호선 영인~둔포 도로공사 구간 중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와우리 일원 유물산포지를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초기국가시대 마한의 널무덤[토광묘(土壙墓)],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건물지와 널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위치]
와우리유적은 국도 34호선 와우교차로 동쪽 1㎞ 지점의 현대오일뱅크 신항만주유소 인접 도로 구간으로 낮은 구릉[높이 87.3m]의 남쪽 사면에 있다. 와우리유적 동쪽에 있는 고용산과 서쪽에 있는 원랑산은 낮은 구릉으로 이어져 있다. 북쪽에는 안성천 하구의 아산호와 신언천 주변으로 넓은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남쪽에는 성내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주천 주변으로 넓은 충적지대가 발달해 있으며 경작지로 이용된다.
[발굴 조사 경과]
와우리유적은 공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대전지방국토관리청의 국도 34호선 도로 확·포장 공사 계획 구간을 지표 조사하여 처음 학계에 보고되었다. 충청매장문화재연구원[현재 충청문화재연구원] 주관으로 1998년 8월 1일부터 30일까지의 시굴 조사를 거쳐 1998년 12월부터 1999년 8월까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형태]
와우리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12기, 초기국가시대 마한의 도랑을 돌린 널무덤[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 2기,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돌덧널무덤 24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건물지 9동 및 널무덤 53기가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가늘고 긴 직사각형[세장방형(細長方形)], 직사각형[장방형(長方形)], 정사각형[방형(方形)]의 평면 형태를 보인다. 가늘고 긴 직사각형 및 직사각형 주거지는 유적 중앙과 서쪽 일원에서 확인되고, 직사각형 주거지는 유적 동쪽 일원에서 확인된다. 5·6·8호 가늘고 긴 직사각형 주거지는 매우 긴 모습이고 바닥 가장자리에 도랑이 확인된다. 화덕자리[노지(爐址)]는 주거지 길이 방향으로 바닥 가운데에 2~4개가 열을 이룬다. 주거지의 짧은 벽에 치우쳐 저장구덩이[저장공(貯藏孔)]가 있다. 한편 6호 주거지 내부에는 깬 돌을 고깔 모양으로 쌓아 올린 돌무지[적석(積石) 시설]가 중앙에 있다. 내부는 깬 돌과 흙으로 채워져 있는데, 내부에서 행한 일종의 의례와 관련된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직사각형 주거지에서는 아무런 내부 시설이 확인되지 않는다.
[출토 유물]
와우리유적의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민무늬토기에는 골아가리 구멍무늬[구순각목공렬문(口脣刻目孔列文)], 구멍무늬[공렬문], 짧은빗금무늬[단사선문(短斜線文)] 등의 장식이 있고 굽다리접시 모양 토기[두형토기(豆形土器)]도 있다. 유물 출토 빈도는 정사각형 주거지에 비해 가늘고 긴 직사각형 및 직사각형 주거지에서 골아가리 구멍무늬 토기 및 구멍무늬 토기가 많이 출토된다. 이 외에 돌도끼[석부(石斧)], 돌끌[석착(石鑿)], 돌살촉[석촉(石鏃)], 돌검[석검(石劍)], 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 등이 출토되었다.
[현황]
와우리유적은 현재 국도 34호선 도로 개설이 완료되어 그 흔적을 확인할 수는 없다. 유적 관련 자료는 충청문화재연구원의 발굴 조사 보고서를 통해 기록·보존하였다.
[의의와 평가]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의 와우리유적에서는 대체로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골아가리무늬와 구멍무늬가 결합된 토기류와 각종 석기류가 출토되었다. 동쪽의 고용산과 서쪽 원랑산 사이의 낮은 구릉지대에 있는 와우리유적은 안성천을 활용한 어로 활동과 동시에 주변의 하천과 들판을 활용한 농경 활동이 유리하기 때문에, 비교적 청동기시대 규모가 꽤 있는 마을의 일부 모습이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아산 지역 일원에 대규모 마을이 형성되는 모습이 뚜렷해진다. 바로 인접한 영인면 신화리 석기 출토지 1·2에서 돌칼 등 여러 석기가 출토되고, 백석포리에서도 청동기시대 유구가 확인되고 있어 와우리유적도 그러한 모습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