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594
한자 李柬神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 71-4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민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677년 - 이간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727년 - 이간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24년연표보기 - 이간 신도비 건립
이전 시기/일시 2005년 - 이간 신도비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로 이전
현 소재지 이간 신도비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 71-4 지도보기
원소재지 이간 신도비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257 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양식 비좌개석
관련 인물 이간
재질 오석|화강석
크기(높이,너비,두께) 375㎝[높이]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신도비.

[개설]

1924년에 건립한 이간(李柬)[1677~1727]의 신도비(神道碑)이다. 이간은 본관이 예안(禮安),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이며 조선 후기 유학자로,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제자 8명인 강문팔학사 중 한 명이다. 이간은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해 낙론(洛論)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건립 경위]

외암 이간의 묘는 원래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에 있었는데 시호를 받은 1811년경에 지금의 자리인 송악면 외암리 210번지외암마을 북서쪽 삼상당으로 옮겼다. 유곡리에 신도비가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묘 이장 이후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후손들이 주도하여 묘소 앞에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이간의 묘소는 외암리 북서쪽 능선 기슭, 속칭 ‘삼상당’에 조성되어 있으며, 이간 신도비는 묘소 50m 정도 앞[외암리 257번지]에 건립되었다. 2005년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외암마을 입구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형태]

이간 신도비는 네모난 비석 받침[碑座], 비신(碑身), 팔작지붕 형태의 지붕돌[蓋石]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은 오석, 받침돌과 지붕돌은 화강석으로 조성하였으며, 높이는 375㎝이다. 받침돌은 좁고 높은 편이며, 지붕은 비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비가 좁은 편이다.

비문(碑文)은 홍직필(洪直弼)[1776~1852]이 짓고, 윤용구(尹用求)[1853~1939]가 썼다. 전자(篆字)는 이간의 6대손인 이정렬(李貞烈)[1868~?]이 썼다. 비신 상단 두전(頭篆)으로 4면에 걸쳐 ‘시문정공 외암이선생 신도비명(諡文正公巍巖李先生 神道碑銘)’이 전서체(篆書體)로 새겨져 있다. 비신의 앞뒤, 왼쪽 면에는 홍직필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오른쪽 면에는 추기(追記)가 있다. 추기에 따르면 부사(府使) 이원로(李源老), 승지(承旨) 이위래(李渭來)[1861~?]와 인근 신사(紳士)들의 찬조로 이 비석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추기는 이간의 사손(嗣孫)[자손이 없는 사람의 유산을 계승할 수 있는 4촌 이내의 근친]인 이용헌(李用憲)이 짓고, 이간의 6세손 이욱렬(李郁烈)이 썼다.

[금석문]

시문정공 외암이선생 신도비명(諡文正公巍巖李先生神道碑銘)

[현황]

이간 신도비의 받침돌과 지붕돌에는 돌이끼가 많이 끼어 있고 비신은 앞면 등에 긁힌 흔적이 여러 곳 보인다. 주위에는 근래에 설치된 돌난간이 둘려져 있다. 옮겨진 현 위치는 외암마을 입구이며, 잔디와 소나무 등으로 가로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의의와 평가]

이간 신도비는 1924년에 건립되었지만, 19세기 후반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19세기에 마련된 비석 부재에 1924년 글씨를 새긴 것일 수도 있고, 건립 당시에 19세기 후반의 양식을 모방했을 수도 있으나 그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이간 신도비는 조선 후기 아산의 대표적 유학자인 외암 이간의 생애와 사상 등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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