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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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克善 |
영어공식명칭 | Jo Geukseon |
이칭/별칭 | 유제(有諸),야곡(冶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교빈 |
[정의]
조선 후기 온양군수를 지낸 문신.
[개설]
조극선(趙克善)[1595~1658]은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나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와 포저(浦渚) 조익(趙翼)에게 배웠고, 인조와 효종 대에 걸쳐 온양군수를 비롯하여 여러 벼슬을 했으며,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아산 도산서원(道山書院)과 예산 회암서원(晦庵書院)에 모셔졌다.
[가계]
조극선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제(有諸), 호는 야곡(冶谷)이다. 예산군 봉산면 출신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조곤(趙鵾), 할아버지는 조흥무(趙興武), 아버지는 조경진(趙景璡)이다.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 진사 이치림(李致霖)의 딸이며, 부인은 강화최씨(江華崔氏) 첨지 최찬(崔贊)의 딸이다. 3남 2녀를 두었고, 장남 조창한(趙昌漢)과 차남 조성한(趙晟漢)은 현감을 지냈으며, 삼남은 조정한(趙晸漢)이다. 큰딸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증손인 참봉 이광윤(李光胤)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선비 이은(李垠)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조극선은 1623년(인조 1)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거쳐 종부시주부(宗薄寺主簿),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냈다. 그 뒤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있던 1636년(인조 14)에는 이조정랑으로서 폐단을 없애고 나라를 튼튼히 하는 방책을 올렸다. 면천군수를 지낸 뒤 고향에 돌아왔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려 하였지만 길이 막혀 부모를 모시고 섬으로 피난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관직을 사양하다가 스승 조익의 권유로 1648년(인조 26) 온양군수를 맡은 뒤 다시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임금이 간곡히 부르자 1657년(효종 8)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맡았고 1658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조극선이 온양군수로 있을 때 인조가 승하하자 죽만 먹고 짚으로 베개를 하며 친상(親喪)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효종의 행장(行狀)에도 기록될 만큼 효행과 학문이 높았으며, 부친이 돌아가자 벼슬을 버리고 예산군 봉산면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 까닭에 동네 이름을 ‘시묘동’[현재 시동리]이라 하였다.
[학문과 저술]
잠와(潛窩) 이명준(李命俊)에게 배웠고, 이후 이명준의 권유로 처가가 있는 신창[현재 아산시]에 왕래하면서 박지계와 조익의 문인이 되었다. 독실한 성리학자로 예학에 밝았으며, 『야곡집(冶谷集)』 10권과 『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가 있다.
[묘소]
조극선의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 대성산에 장사를 지낸 후 봉산면 시동리 산16으로 옮겼다. 봉산면 시동리 산2-1에 조극선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효행이 뛰어난 조극선이 출타한 부친을 늘 기다리던 곳에 덕산현감 이담(李湛)이 ‘효교교(孝橋橋)’라 쓴 비석을 세워 주었다. 예산군 봉산면 효교리에 있는 다리가 그곳이다. 1665년(현종 6) 효자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예산군 봉산면에 효열비(孝烈碑)가 세워졌다. 1666년(현종 7)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문목(文穆)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20년(숙종 46) 스승 조익이 배향된 도산서원에 모셔졌고, 회암서원에도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