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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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丙子胡亂 |
영어공식명칭 | Qing Invasion of Joseon |
이칭/별칭 | 병자란,병란,병정노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충청남도 아산 지역을 포함한 조선 각지에서 청의 침입으로 피해를 받은 전쟁.
[개설]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 살았던 백성들은 근왕군(勤王軍)과 의병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참여하여 전투를 수행하기도 하였지만,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많은 피해를 받았다.
[역사적 배경]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숭명배금(崇明排金) 정책을 표방한 조선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은 후 후금(後金)과 정묘약조(丁卯約條)[정묘조약]를 통해 형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후금이 만주 대부분을 장악한 이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하며 조선에게 군신 관계와 세폐(歲幣)[공물], 병사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 조정의 척화 의지가 고조되자 청은 왕자와 척화 대신을 볼모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청의 요구를 묵살하자 청은 이를 명분으로 조선에 침입하였다.
[경과]
1636년 12월 8일 조선을 침략한 청군이 12월 14일 개성을 통과했다는 장계가 올라오자 인조는 강화도 피신을 포기하고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농성하였다. 이후 각지에서 근왕군이 남한산성으로 출정하여 청군과 전투를 치렀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정세규(鄭世規)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의배(李義培)가 인솔하는 충청도 근왕군은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가장 먼저 전장에 도달하여 청군과 싸웠으나 여러 차례 패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충청도 근왕군과 별도로 청의 군대에 맞서 싸우거나 싸울 준비를 했던 아산 출신 인사들도 있다.
온양 출신인 맹세형(孟世衡)은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있으면서 군대를 모아 남한산성으로 출진하고자 하였으나 경상감사(慶尙監司)의 명령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고, 맹욱은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적을 뚫고 성으로 들어가 왕을 호종하였다. 또 아산 출신인 이진행(李震行)은 병자호란 당시 사직단(社稷壇)의 신주를 받들고 강화도에 안전하게 봉환(奉還)한 공으로 사직령(社稷令)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신창에 살던 조익(趙翼)은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재직하였으나 강화도에서 실종된 아버지를 찾느라고 왕을 호종하지 못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패잔병을 모아 청군과 싸우며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 했던 행적이 알려져 풀려나기도 하였다.
[결과]
충청도 근왕군을 포함한 조선군은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하다가 강화도가 함락되고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하면서 해산하였다. 충청남도 아산 지역은 병자호란의 직접적인 전투 지역에서 벗어나 있었으나, 아산 출신의 근왕군과 관원들이 전투에 참여하여 인명 피해가 있었다. 특히 민간의 피해도 많았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초에 아산 지역까지 들어왔던 청군에 의해 음봉면 송촌리 효자 김현(金鉉)이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인주면 해암리 홍우기(洪宇紀)의 처 여흥민씨(驪興閔氏), 둔포면 운용리 신광철(申光徹)의 처 청송심씨(靑松沈氏), 아산현 이지웅의 처 임소사(林召史), 신창현 웅산리 황우해(黃禹海)의 처 박씨(朴氏)와 아들 황의길(黃義吉) 등이 청군의 핍박을 피해 자결하여 병자호란 때의 열녀, 효자로 기록되어 있어서 아산 지역 백성들의 피해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병자호란으로 아산 지역 사람들은 근왕군으로 참여하여 목숨을 잃었거나 이진행처럼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병자호란으로 여러 명의 열녀와 효자가 나타났으니 백성들이 큰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