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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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社稷壇 |
영어공식명칭 | Sajikd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강경윤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8년 - 사직대제(社稷大祭) 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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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아산현 사직단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
소재지 | 온양현 사직단 - 충청남도 아산시 읍내동 |
소재지 | 신창현 사직단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
[정의]
조선시대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 있던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터.
[개설]
사직단(社稷壇)은 본래 왕이 사직신((社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지만, 주현(州縣)에서는 지역 수령이 대신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고을에는 사직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는 아산현·온양현·신창현에 각각 있었다.
[내용]
사직단은 풍흉을 주재하는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단(壇)이다. 주현의 사직제는 봄, 가을 두 번 지냈으며 국왕 대신 그 지역 수령이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은 종묘(宗廟)와 더불어 국가 자체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일 정도로 상징적인 곳이었다.
1819년(순조 19)에 간행된 『신정아주지(新定牙州誌)』를 보면, 충청도 아산 지역에서는 현 북쪽에 있는 여단(厲壇)에서의 여제(厲祭)는 봄에는 청명일, 7월 백중일, 겨울에는 10월 초하루 등으로 1년에 3차례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또한 현의 동남쪽에 있는 성황단(城隍壇)에서의 성황제(城隍祭)는 봄, 가을, 겨울 3차례 지내는 여제의 3일 전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아산 지역의 사직단은 각각의 현에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아산현은 지금의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온양현은 지금의 아산시 읍내동, 신창현은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에 각각 있었다. 조선 전기의 자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온양군의 서쪽, 신창현의 서쪽, 아산현의 서쪽"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에는 "온양 관아의 서쪽 1리[약 400m], 신창 관아의 서쪽 1리, 아산 관아의 서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이 방향만을 표시한 것에 비해 『여지도서』에는 구체적인 거리가 표시되어 있어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다.
1983년에 간행된 『아산군지』에는 윤정식(尹鼎植) 현감이 부임했을 당시 온양군에 있던 사직단의 건물이 흔들린 까닭에 크게 놀라 경비를 내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중수를 할 때 부서진 곳을 때우고 돌로 쌓아서 사직단 터를 견고하게 하였다고 한다. 7월 초에 길일을 잡아 환안(還安)[다른 곳으로 옮겼던 신주(神主)를 다시 제자리로 모심]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의 지리지인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의 단묘조(壇廟條)가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사직대제(社稷大祭)는 통감부가 1908년 칙령으로 향사(享祀)[제사]에 관한 시설을 대부분 철폐시킴에 따라 폐지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