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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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克成 |
이칭/별칭 | 성지(成之),청라(靑羅),우정(優亭),충정(忠貞),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474년 - 김극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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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96년 - 김극성 사마시 장원 급제, 전적겸종학사회(典籍兼宗學司誨)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98년 - 김극성 대과 장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00년 - 김극성 북평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03년 - 김극성 사간원 헌납 승진 |
활동 시기/일시 | 1506년 - 김극성 중종 반정에 참여, 분의정국공신 4등에 녹훈, 장악원(掌樂院) 정(正)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07년 - 김극성 서천 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18년 - 김극성 예조참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21년 - 김극성 공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어 북경을 다녀옴. |
활동 시기/일시 | 1523년 - 김극성 예조판서, 우참찬, 이조판서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31년 - 김극성 김안로의 모함으로 흥덕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537년 - 김극성 우의정 승진 |
몰년 시기/일시 | 1540년 - 김극성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13년 - 김극성 신도비 건립 |
묘소|단소 |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송덕신송길 457-24[신송리 산71-11] |
사당|배향지 | 신도비|사우|사당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송덕신송길 457-24[신송리 산71-1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대표 관직 | 우의정 |
[정의]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
[개설]
김극성(金克成)[1474~1540]의 고조할아버지 김성우(金成雨)가 보령에 정착한 이래 집안이 보령에 세거(世居)하였다. 보령에서 나고 자란 김극성은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생활 중 중종(中宗)[재위: 1506~1544] 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30여 년간 내외직을 번갈아 맡으며,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을 맡아 바르게 처리하여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성지(成之), 호는 청라(靑羅) 또는 우정(優亭)이다. 김극성의 고조할아버지는 고려 말 무장이었던 전라우도 도만호(都萬戶) 김성우이며, 충청남도 보령에 정착하였다. 증조할아버지 김남호(金南鎬)는 증(贈) 이조판서, 할아버지 김중로(金仲老)는 감찰로 증 좌찬성, 아버지 김맹권(金孟權)은 진사이며, 증 영의정이다. 모두 김극성으로 인해 증직(贈職)을 받았다.
[활동 사항]
보령 광산 김씨의 입향조(入鄕祖) 김성우가 김극성의 고조할아버지이다. 김성우가 고려 말 보령에서 말년을 보낸 후 그 후손이 대대로 보령에 세거하였다. 김극성은 어릴 적부터 자품(資稟)이 남달랐다. 연산군 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 급제하였고, 2년 뒤 대과(大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니, 나이 25세였다. 이후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북경을 다녀오고 북평사(北評事)에 제수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연산군이 터무니없는 죄로 심순문(沈順門)[1465~1504]을 죽이고자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모두가 몸을 사리고 침묵할 때 김극성이 이를 비판하며 심순문의 편에 섰다. 이에 사람들은 “김극성도 필시 심순문과 함께 속절없이 죽고 말 것이다.” 하였으나 김극성은 태연자약하게 “죽고 사는 것은 큰 일이니, 각자 자기 뜻대로 처신하며 될 것이오.” 하며 연산군에게 심순문의 억울함을 아뢰었다. 연산군은 끝내 심순문을 사형시켰으나, 김극성에게는 죄를 내리지 않았다.
중종이 즉위하자 김극성은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어 장악원(掌樂院) 정(正)에 올랐고, 이듬해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자급(資級)이 올랐다. 그러나 보령에 있는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스스로 외직으로 나가 서천(舒川) 군수가 되었다. 그나마도 얼마 뒤 관직을 그만두고 보령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세상을 뜰 때까지 부모 봉양에 전념하여 향리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김극성은 내직과 외직을 오가며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 데 힘썼다. 계속된 흉년으로 의주(義州)의 민심이 흉흉하자 모두 김극성을 적임자로 천거하였고, 김극성은 의주 목사가 되어 백성들을 인의(仁義)로 위로하고 성심(誠心)으로 심복(心服)시키니 한 해 만에 고을이 안정을 되찾았다. 김극성은 내외직을 번갈아가며 승진을 거듭하여 1523년에는 예조판서가 되었고, 같은 해 다시 판서(判書)와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1531년 김안로(金安老)[1481~1537]의 모함으로 전라도 흥덕(興德)에 유배되어 7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두문불출하며 친구들의 문안 편지나 선물조차도 일절 받지 않았다. 1537년에 김안로가 처형되자 다시 조정에 돌아와 우의정이 되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도성의 많은 이들이 “선한 사람을 다시 보게 되어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였으니, 그동안의 관직생활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결과였다.
김극성은 넓은 도량을 지녀 사람들과 화합하되 좋지 못한 습속(習俗)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노여운 안색으로 대하지 않았다. 성품이 검소해 집 안에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고 한다. 1540년 김극성이 사망하자 왕이 매우 슬퍼하며 사흘간 조회를 중지하고 부의(賻儀)와 제사의 은전(恩典)을 후하게 내렸다.
[학문과 저술]
『우정집(憂亭集)』이 있다.
[묘소]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송덕신송길 457-24[신송리 산71-11]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신도비와 사우가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송덕신송길 457-24[신송리 산71-11]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