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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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孟權 |
이칭/별칭 | 만취당(晩翠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제연 |
활동 시기/일시 | 1455년 - 김맹권 보령으로 귀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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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490년 - 김맹권 직첩을 되돌려받음 |
묘소|단소 | 독정 - 충청남도 보령시 죽정동 독정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대표 관직 | 집현전 학사 |
[정의]
보령 지역에서 후진 양성에 공을 세운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김맹권(金孟權)[?~?]은 집현전 학사로 세종(世宗)[재위: 1418~1450]의 신임을 받았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재위 1455~1468]가 왕위를 찬탈하자 충청도 보령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증조할아버지는 전라우도 도만호 김성우(金成雨)[1327~1392], 아버지는 감찰 김중로(金仲老)이다. 아들은 우의정 김극성(金克成)[1474~1540]이다.
[활동 사항]
김맹권은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일찍이 진사가 되고, 문명(文名)이 높아 집현전 학사로 뽑혔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왕세손이었던 단종(端宗)[재위: 1452~1455]을 보필하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보령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공을 세워서 후에 ‘매월지충절(每月之忠節)’이라 하였다. 김맹권의 아들 김극성의 『우정집(憂亭集)』에 의하면 “공의 교화 후에 성암(省菴) 이지번(李之蕃)[1508~1575]·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1578]·명곡(鳴谷) 이산보(李山甫)[1539~1594]·천휴당(天休堂) 이몽규(李夢奎)[1510~1563]가 모두 이 고을에서 배출되어 공을 모두 향선생(鄕先生)으로 칭했다”고 하여, 김맹권이 조선 전기 보령에 끼친 학문적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묘소]
김맹권의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죽정동 독정에 있다.
[상훈과 추모]
1490년(성종 21) 직첩(職牒)을 되돌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