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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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景在 |
이칭/별칭 | 계행(季行),송서(松西),소은(紹隱),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 출신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이경재(李景在)[1800~1873]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충청남도 보령 한산 이씨 입향조인 이치(李穉)의 형인 이질(李秩)의 후손이다.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행(季行), 호는 송서(松西)·소은(紹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태중(李台重)[1694~1756], 할아버지는 이학영(李學永)이다. 아버지는 현감 이희선(李羲先), 어머니는 박홍수(朴紭壽)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경재는 1822년(순조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문과 급제 시 방목(榜目)에는 거주지가 한성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경재의 증조할아버지 이태중이 1730년 문과 급제 당시 방목에 기록된 거주지는 충청도 결성(結城)이었다. 결성은 보령과 접한 지역이다. 이경재는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을 비롯하여 이조참의·이조참판·평안도관찰사·대사간·대사헌·부제학·한성판윤 등 내외 요직을 역임하였다.
철종(哲宗)[재위: 1849~1863]이 즉위한 1849년 사은사(謝恩使)로 청(靑)에 다녀와 상의군(上議軍)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을 지냈다.
이경재가 정계에 있을 때에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시기였고, 전국에서 농민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경재는 순조(純祖)[재위: 1800~1834] 대와 헌종(憲宗)[재위: 1834~1849] 대에 각각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둘러보고 고을의 민폐를 임금에게 알린 바 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이경재는 계속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1866년(고종 3)에 대사헌에 제수된 이경재가 충청도 청양에 머물러 있다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기록이 있다. 청양은 보령과 경계를 접한 지역으로 양 지역에 세거하였던 한산 이씨 가문은 같은 계통이었다.
고종(高宗)[재위: 1863~1907] 대에 이르러 이경재의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1873년(고종 10) 이경재가 사망한 후 고종은 “화락한 자세와 깨끗한 지조에 대해서는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바...”라면서 안타까워하였다. 고종은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던 일. 또는 그 제사]하며, 녹봉(祿俸)은 3년 동안 보내 주고, 사손(嗣孫)[적처의 장자인 적장자가 없는 경우 가계를 계승할 자손]에 대해서는 결복(闋服)[어버이의 삼년상을 마침]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런데 1876년에도 사손이 연한에 미치지 못해 서용(敍用)[죄를 지어 면관(免官)되었던 사람을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함]되지 못하였다 하니, 구애받지 말고 임용하도록 한 기록이 『고종실록(高宗實錄)』에 보인다.
[묘소]
이경재의 묘소가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죽림리 아차산에 묘비와 함께 있었는데, 2004년 후손들이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876년(고종 13) 문간(文簡)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