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497
한자 李穉
이칭/별칭 자담(子聃)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77년연표보기 - 이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07년 - 이치 사마시 입격
몰년 시기/일시 1530년연표보기 - 이치 사망
묘소|단소 이치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한산
대표 관직 한성부참군|사헌부감찰

[정의]

한산 이씨 보령 입향조이며, 토정 이지함의 아버지인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이치(李穉)[1477~1530]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1578], 이산해(李山海)[1539~1609] 등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였고, 충청남도 보령에 세거하였다.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담(子聃)이다. 할아버지는 대사성 이우(李堣), 아버지는 현감 이장윤(李長潤)이다. 부인은 광산 김씨 김맹권(金孟權)[?~?]의 딸이다. 토정 이지함이 아들이며, 손자 중에는 영의정에 이른 이산해가 있다.

[활동 사항]

이치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1504년(연산군 10) 찬성(贊成)을 지낸 작은아버지 이파(李坡)와 함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좌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났다. 조선 초기부터 충청남도 보령의 유력한 집안이었던 광산 김씨 김맹권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김맹권의 증조할아버지 김성우(金成雨)[1327~1392]는 고려 말 권문세족으로 보령에 창궐하는 왜구를 무찌르고, 보령 청라동에 입향하여 보령 지역에 상당한 재산을 형성하였던 인물이다.

이치가 이 집안의 사위가 되면서 한산 이씨광산 김씨의 본거지인 청라동 복병리와 이웃한 장산리 지역, 지금의 주교면 일대, 오천의 교성리 등으로 세거지를 넓혀갔다. 보령의 경제적 기반에서 이치의 네 아들인 이지영(李之英), 이지번(李之蕃), 이지무(李之茂), 이지함(李之菡)과 영의정을 지낸 손자 이산해를 비롯해 사마시와 문과 급제자를 다수 배출하였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입격하였을 때에 이치의 거주지는 이미 보령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금오랑(金吾郎)에 제수되고, 한성부참군·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외직으로 우봉현령(牛峯縣令)과 수원통판을 지냈다. 효성이 지극하여 노래자(老萊子)[노자(老子),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노자와 더불어 도가의 창시자로 알려졌으며, 72세에 노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렸다고 한다.]를 본받아 어머니를 섬겼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사사로운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후손이 크게 번성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고만에 있다.

[참고문헌]
  • 『보령의 금석문』(대천문화원, 2010)
  • 『보령시지』(보령시지편찬위원회, 2010)
  • 두산백과 두피디아(https://www.doopedia.c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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