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87 |
---|---|
한자 | 洪州義兵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을경 |
[정의]
1895년과 1906년 말 충청남도 홍성 및 보령 지역 일대에서 유생과 농민들이 일으킨 의병.
[역사적 배경]
독립운동의 시작은 한말(韓末) 의병운동에서부터 시작된다. 한말 의병은 한민족이 문화적으로 뛰어난 민족이라는 문화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하여 일본을 대상으로 항전을 전개하였다.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한 의병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항하여 민족의 생존권 회복을 위한 반침략 의병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정의를 지키고 사악함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가톨릭과 서양의 문물을 반대한 19세기 중엽 구한말의 사상 조류]에 입각하여 서양 세력과 서양 세력의 아류가 된 일본의 침략에 항쟁한 것이었다.
[경과]
한말 의병은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갑오변란’과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을 계기로 봉기하였고, 유인석(柳麟錫)[1842~1915]을 비롯한 의병들은 전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유생과 농민들은 의병을 재기하여 항일의병전쟁을 재개하였다.
민종식(閔宗植)[1861~1917]이 일으킨 홍주의병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기세를 올렸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최익현(崔益鉉)[1833~1906]은 태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였으나 체포되어 쓰시마[對馬]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의병의 항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군대해산 후 의병운동은 유생과 농민, 해산 군인뿐만 아니라 노동자, 상인, 교사와 학생 등 전 계층이 참여한 구국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항일의병전쟁이 확산되자 의병 간의 연합 전선이 모색되었다. 각지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던 의병들은 ‘13도창의대진소’라는 연합의병부대를 결성하여 서울 탈환 작전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의병의 끈질긴 항쟁이 계속되자 일본은 군경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 작전을 감행하였다. 화승총이 주요 무기였던 의병들은 근대식 무기를 가진 일본군을 당해 내지 못하였다. 결국 수만 명의 의병들은 일본에 의하여 무참히 학살되었다. 일본은 의병의 근거지가 될 만한 촌락과 가옥을 닥치는 대로 방화하고 민간인을 살육하여 조선을 초토화시켰다. 이로 인하여 의병의 활동은 국내에서 크게 위축되었으며, 살아남은 의병들은 깊은 산에 은거하거나 중국 동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항전을 지속하였다.
[결과]
보령 출신으로 홍주의병에 참여한 인물로는 백관형(白觀亨)[1861~1928] 등이 확인된다. 특히 백관형은 의병뿐만 아니라 1919년 3·1운동 때에도 김백원(金百源)[1859~1935] 등과 협의하여 독립 요구 취지문을 작성하여 총독에게 보내고 보신각 앞에 모인 군중들에게 취지문을 낭독하는 한편, 파리장서에 유림 대표의 일원으로 서명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홍주의병은 충청남도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이지만, 다른 지역의 의병 봉기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또한 1910년대 독립전쟁뿐만 아니라 3·1운동으로 나아가는 독립 정신과 사상을 계승시켰다는 점에서도 독립운동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