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632
한자 吳日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성동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을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5년 9월 23일연표보기 - 오일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오일규, 예산학생동맹 결성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32년 12월 25일 - 오일규, 반민족적 내용이 담긴 「동방의 빛」 연극 공연 저지 사건
몰년 시기/일시 1960년 2월 25일연표보기 - 오일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오일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성동리 지도보기
활동지 충청남도 보령 지역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독서회 학생운동 주도

[정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오일규(吳日圭)[1915~1960]는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하여 보령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학생항일운동의 활동]

오일규는 1930년 4월 충청남도 예산공립농업학교(禮山公立農業學校)에 입학하여 일본인의 한국인 학생 차별 정책에 분노를 느끼던 중 같은 해 5월 중순경 학우인 박희남(朴熙南)·박정순(朴正淳)·김규환(金奎煥) 등과 비밀리에 독서회(讀書會)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항일 반제 투쟁에 관한 서적 등을 윤독·토론하는 등 민족정신 배양과 항일의식 고취를 위한 독서회 활동을 적극 전개하는 한편, 당시 유행하던 문맹퇴치운동과 문자보급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항일학생운동의 세력 확대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32년 4월 예산 출신의 윤봉길(尹奉吉)[1908~1932] 의사가 상하이에서 의거를 일으키자, 이에 자극을 받은 오일규는 5월 초순 정종호(鄭鍾浩)·강봉주(姜鳳柱)·한정희(韓定熙) 등 동교 상급생들이 조직·활동하던 운동단체와 회합을 갖고 본격적인 항일학생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두 조직을 통합할 것을 제의하여 좌익협의회(左翼協議會)를 조직하였다. 좌익협의회는 연구부·조직선전부·에스페란토어부 등 3개의 부서를 설치하였고, 오일규는 조직선전부를 담당하였다. 오일규는 같은 해 5월 14일과 22일 두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갖고 김용재(金用在) 등 선배 졸업생들과 동교 학생 8명을 동지로 규합하여 조직을 강화해 나갔다.

[활동 사항]

오일규는 1932년 6월 학교 측이 학생들에게 무리한 동원령(動員令)을 내린 것을 계기로 박희남·정종호·강봉주 등과 함께 동맹휴학을 결행하였으며 항일투쟁의 목표를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행사 강행을 위한 노력 동원의 부당성, 일본어 과목을 국어로 표기하는 반민족적 처사의 시정,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의 차별 정책 개선, 한국인 교사의 확대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이 사건의 주도자인 오일규는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와 같이 오일규를 비롯한 좌익협의회의 회원들이 다수 학사 처분을 받게 됨과 동시에 일제의 감시 강화로 좌익협의회회의 활동이 위축되자, 9월 18일 정종호·강봉주·한정희·박희남 등과 함께 조직 재건에 합의하여 ‘예산학생동맹(禮山學生同盟)’을 조직하였다. 이를 계기로 오일규는 지역별 항일학생 운동조직과 연계를 목적으로 동교 내의 5학년생과 3학년생들을 동지로 규합하였으며, 밖으로는 지방의 청년동지와 서울YMCA를 비롯한 외지의 학생조직과 연계를 강화하는 등 학생운동의 기획과 기밀조직의 관리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일본 경찰이 감시를 강화하여 조직이 노출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오일규를 비롯한 회원들은 같은 해 11월경 조직 관리의 위장 방법으로 비밀결사 명칭을 회합일인 ‘토요회(土曜會)’로 개칭하는 한편, 지방의 민족청년들과 연대를 강화하면서 반일 투쟁 방법을 협의하였다. 그러던 중 1932년 11월 중순 일제의 관제 연극단체인 극단 만경좌(萬鏡座)가 예산군 예산면 시장터에서 만주(滿洲)의 마적(馬賊)으로부터 재만(在滿) 한인을 일제가 보호한다는, 반민족적 내용이 담긴 「동방의 빛」이라는 연극을 공연하였다. 그러자 오일규는 회원들과 함께 이 연극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공연 관람 거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극단에 공연 중단을 요구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2년 12월 25일 극단원들과 충돌한 사건을 계기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3년 3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이에 대해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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