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8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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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保寧 聖住寺址 |
영어공식명칭 | Seongjusa Temple Site, Boryeong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정성권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8년 - 보령 성주사지 동국대학교박물관에서 1차 학술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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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72년 - 보령 성주사지 동국대학교박물관에서 2차 학술 조사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8월 13일 - 보령 성주사지 사적 지정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1~1996년 - 보령 성주사지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1~6차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9~2014년 - 보령 성주사지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7~11차 발굴 조사 |
소재지 | 보령 성주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
성격 | 절터 |
지정 면적 | 67,295㎡ |
소유자 | 보령시 등 |
관리자 | 보령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제307호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절터.
[변천]
성주사(聖住寺)는 백제 시대 오합사(烏合寺)라는 절로 창건된 후, 삼국 통일 직후 김인문(金仁問)[629~694]의 원찰(願刹)로 크게 중창되었다. 9세기 전반경 김헌창(金憲昌)의 난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후 통일 신라 후기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으로 새롭게 개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주사는 몽골의 침략기 이후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어 임진왜란 직후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치]
보령 성주사지(保寧 聖住寺址)는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일원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보령 성주사지가 학계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1990년대 들어와 충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실시되었다. 6차까지 진행된 이때의 조사는 가람 중심부에 해당하는 건물들의 규모와 층위에 따른 조성 방법 및 편년 등이 조사되었다. 2000년대 들어와서는 가람 중심부를 제외한 주변 일대에 총 5차례의 조사가 실시되었다. 2014년까지 총 11차에 걸친 고고학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충남대학교박물관의 발굴 조사 결과 보령 성주사지는 오합사 창건기의 건물이 1탑(一塔) 1금당식(一金堂式)으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가람 배치는 남쪽으로부터 중문지(中門址),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 하부 목탑지(木塔址), 금당지(金堂址), 강당지(講堂址)가 남북 일직선상으로 배치되고, 주변을 회랑(廻廊)이 장방형의 형태로 두른 비교적 간단한 평면을 가진 가람으로 조사되었다.
사역 전체에 대한 발굴 조사가 완료된 2014년 이후의 보령 성주사지 연구 성과물은 9세기 중반경 새롭게 조성되는 성주사 이전 선대 가람의 창건기를 7세기 중·후반경으로 추정한 것이다. 창건 주체는 당시 웅천주(熊川州)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김인문 일가일 것으로 보고 있다. 기존에 오합사의 가람 배치로 알려진 1탑 1금당식 유구(遺構)[옛날의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잔존물]를 백제계 가람의 영향을 받아 김인문 일가가 창건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현재 보령 성주사지에서 백제 기와가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백제 사찰의 존재는 인정할 수 있다. 다만 오합사 창건기 유구에 대해서는 고고학계의 논의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관련 자료]
성주사와 관련된 사료는 통일 신라 시대 한림랑(翰林郞) 직책을 맡은 김립지(金立之)가 9세기 중반경 비문을 작성한 김립지찬 성주사비(金立之撰 聖住寺碑)가 있다. 김립지찬 성주사비는 파손되어 비편(碑片)이 현재 부여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성주사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는 사찰 경내에 있는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大郞慧和尙塔碑)가 대표적이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라고도 불리는데, 낭혜화상 무염(無染)[800~888]이 888년(진성여왕 2)에 입적하자 낭혜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탑비이다.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는 최치원(崔致遠)[857~?]이 왕명을 받고 890년(진성여왕 4)에서 897년(효공왕 원년) 사이에 비문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 성주사와 관련된 중요한 사료로는 조선 전기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 聖住寺 事蹟)’이 있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 따르면 성주사는 백제 법왕이 599년(법왕 원년)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무하려는 뜻에서 세운 절이라 한다.
[의의와 평가]
김인문 일가에 의해 창건된 성주사 이전의 선대 가람은 150여 년간 존속한 후 822년(헌덕왕 14) 발생한 김헌창의 난에 연루되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사’라는 이름의 사찰은 무염이 주도하여 9세기 중반경 대대적으로 개창하였다. 무염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821년(헌덕왕 13) 당나라로 유학을 간 후 845년(문성왕 7) 귀국하였다. 이후 보령의 성주사에서 40여 년 동안 주석(住錫)하였으며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개산조(開山祖)가 되었다. 성주사의 창건에는 김흔(金昕)[803~849], 김양(金陽)[808~857]과 같은 김인문계 후손이 후원자가 되어 경제적 지원을 함으로써 대규모 사찰로 새롭게 조성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령 성주사지는 절터의 남쪽에서부터 중문지, 성주사지석등(聖住寺址石燈),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금당지가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금당지 뒤편에는 통일 신라 후기에 조성된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東 三層石塔),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西 三層石塔),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中央 三層石塔) 등 삼층석탑 3기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다른 사찰 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석탑 배치이다. 삼층석탑 3기의 뒤편에는 강당지가 있다.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는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에서 서쪽으로 80m 떨어진 곳에 있다.
보령 성주사지는 유서 깊은 역사를 간직한 장소로 인정되어 1984년 8월 13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