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12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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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 水軍- 一翼, 忠淸水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661-1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심상육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수군의 군영.
[개설]
조선 시대 수영(水營)은 오늘날의 해군에 해당하는 지방 군사조직이다. 수영은 도(道)별로 설치하였으며,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주재하였다. 충청수영(忠淸水營)은 충청도 해안 방어의 본영으로 중서부 서해안의 왜구 침탈 및 조운선(漕運船) 등의 보호 역할을 담당하였다.
[충청 수군의 최고사령부, 충청수영]
우리나라는 동쪽, 서쪽, 남쪽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조선 시대에도 연안 및 조운선 등을 보호하기 위해 수군이 있었다. 조선 시대 지방 군사조직은 지방 행정조직과 연동하여 관찰사(觀察使)가 육군을 지휘하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담당하였다. 수군 역시 관찰사가 수군을 총괄하는 수군절도사를 겸하였지만, 따로 수영을 설치하여 다른 사람을 임명하기도 하였다.
충청수영은 우리나라 중서부 서해안에 설치된 지방의 수군영(水軍營)이었다. 주진(主鎭)[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가 소재하던 진(鎭)]은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이고, 최고 지휘관은 수군절도사였다. 충청수영의 수군절도사는 별도로 임명되었다. 수군절도사 예하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다스리는 거진(巨鎭)[조선 시대 진관(鎭管) 체제에 따라 각 도에 설치한 중간 규모의 군사 진영]과 만호(萬戶)·도위(都尉) 등이 배속된 제진(諸鎭)을 두었다.
고려 말기의 왜구 침입을 막고자 1396년(태조 5) 홍자해(洪自海)를 고만(高巒)[현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 솔섬이 있는 곳]의 첨사(僉使)로 임명한 것을 충청수영의 시초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고만에 설치되었던 수군영은 얼마 후 대회이포(帶回伊浦)로 옮겨졌고, 충청수영이 만들어졌다. 대회이포는 지금의 오천항 일대이며, 사적으로 지정된 보령 충청수영성이 축조된 곳이다.
충청수영 산하에는 마량(馬梁), 서천포(舒川浦), 소근포(所斤浦), 파지도(波知島), 당진포(唐津浦), 안흥진(安興鎭) 등의 거진과 제진을 두었고, 군선과 병력은 142척에 8,414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으로 1896년(고종 33) 각 도의 수영 이하 모든 군사조직이 해체되면서 충청수영도 폐지되었다.
충청수영은 왜란과 호란과 같이 국난이 발생하였을 경우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에 소속되어 통어사(統御使)의 지휘를 받아 외적을 무찔렀다. 19세기 이양선(異樣船)[조선 후기에 연안 지역에 출몰했던 정체불명의 배]이 많아질 시점에는 이양선의 감시 역할도 담당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권설봉수(權設烽燧)[군영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봉수]도 운영되었다. 그밖에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는 역할도 주요 임무 중의 하나였다.
[보령 충청수영성]
충청수영이 들어선 후 1447년(세종 29)부터 동헌(東軒)과 아사(衙舍) 등의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475년(성종 6)에 시인(詩人)과 묵객(墨客)이 자주 찾은 영보정(永保亭)이 신축되어 임진왜란 전에 33동 312칸 규모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이후 북문과 원산창(元山倉), 진휼고(賑恤庫) 등이 건축되고 보수되었다.
충청수영성은 1510년(중종 5) 돌로 쌓았는데, 길이는 3,174척(尺)[약 962m]에 높이는 11척[약 3.3m]에 달하였다. 구릉의 정상을 중심으로 주변에 성을 쌓아 성 안에서 성 밖을 관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성 안에는 우물 4곳, 못 1곳, 성벽에 옹성과 성문이 5개씩 있다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기록되어 있다.
[현황]
1896년에 폐영된 충청수영은 2022년 현재 충청수영성의 성벽을 일부 볼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건축물은 사라졌지만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충청수영 내삼문(內三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충청수영 장교청(將校廳)과 충청수영 진휼청((賑恤廳)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