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간섭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44
한자 元干涉期
영어공식명칭 Won Ganseopgi|Period of Yuan Interven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류호석

[정의]

고려 후기 전라북도 부안 지역이 80여 년간 원의 지배를 받던 시기.

[몽골군의 침략]

고려는 건국 이래 끊임없이 외침에 시달렸다. 성종(成宗) 대 이래 세 차례나 거란의 침입을 겪었으며, 여진이 세운 금(金)과 중원의 송(宋), 그리고 거란과의 다자 관계 속에서 벼랑 끝 외교를 벌이기도 하였다. 13세기 이후에는 거의 30년 동안 여섯 차례나 몽골의 침입을 받았으며, 급기야 80여 년에 걸친 암울하고 기나긴 ‘원 간섭기’라는 터널을 지나야만 하였다.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4세기 중반에 들어서면 왜구들이 해안은 물론 내지 깊숙이 쳐들어와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다시피 하였다. 약탈과 방화는 물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다. 특히 몽골과 왜구의 침탈은 고려의 국운(國運)을 기울게 하면서 나라의 멸망을 가져온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이곳 부안 지역도 그 같은 외침의 수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몽골족으로 인한 부안 지역의 수난은 1236년(고종 23) 10월 전라도의 전주와 고부에 이어 부령현(扶寧縣)에 몽골군이 쳐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부령현의 별초 전공렬은 휘하 군사를 매복하여 몽골이군 2명과 병장기, 그리고 말 20필을 포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별초군은 상비군의 성격을 띤 지방의 정부군[주현군 또는 주진군]과는 달리 주로 농민들을 모아 조직한 민병(民兵)들이었다. 바로 이들이 각 지역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처럼 대몽 항쟁의 주체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공렬은 의업의 1차 시험에서 합격한 인물이었지만 부령이 위기에 놓이자 별초군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부안 지역에서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외침에 저항하고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부안까지 쳐들어왔던 몽골군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일단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에도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으며, 그때마다 전라도 지역도 많은 피해를 당하였지만 더 이상 부안과 관련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뒤 고려가 몽골이 세운 원(元)에 항복하고 나서 원 간섭기가 시작되며 부안 지역의 수난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원의 일본 정벌에 필요한 전함을 건조하는 공사에 사람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원의 세조(世祖) 쿠빌라이(Khubilai)는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일본 정벌에 나섰다. 원 측의 강요로 고려는 세 차례나 여원 연합군(麗元聯合軍)을 결성하여 일본 정벌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이 고려 내에서 총동원되었다.

원과 고려의 연합군이 결성되어 제1차 일본 원정에 나선 것은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의 일로, 이미 그 해 정월부터 원의 명령으로 고려 조정은 전국에서 공장(工匠)과 인부 3만 500여 명을 징집하여 변산과 천관산 등의 조선소에 보내 대소 선박 900척을 건조하게 하였다. 900척 가운데 큰 선박만 해도 300척이나 되었다. 1월 16일 시작된 조선 공사는 5월 말일에 이르러 완료되어 6월 16일에는 고려 조정에서 대장군(大將軍) 나유(羅裕)를 원에 보내 이를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4개월 반이라는 짧은 시간에 대소 선박 900척을 만들면서 원은 고려의 백성들을 혹독하게 괴롭혔다. 농민들로서는 공역(工役)에 시달리는 일도 고통스러웠지만, 조선 사업에 동원되는 바람에 농사철을 놓쳐 이중 삼중의 어려움을 겪었다. 정부로서는 조선(造船)의 재료 이외에 공장(工匠)과 인부들의 식량을 대는 일도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이처럼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인하여 고려의 국가 재정은 파탄할 지경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시 부안 지역 사람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해 6월 원종(元宗)이 죽고 원에 볼모로 가 있다시피 한 세자[충렬왕(忠烈王)]가 귀국하여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10월 초 1차 일본 원정이 시작되었다. 이때 변산과 전라도 나주에서 건조된 전함들은 금주(金州)[김해]에 총집결하였다가 합포(合浦)[마산]에서 4만 명의 여원 연합군과 함께 일본으로 출전하였다. 연합군은 고려의 도독 김방경(金方慶)이 거느리는 군사 8,000명과 초공수수(梢工水手) 6,700명, 몽한군(蒙漢軍) 2만 5000명 등으로 편성되었다. 연합군은 처음에 대마도를 공격하여 적의 수비군을 대파하고 다시 일본 구주(九州)의 북쪽 해안으로 상륙하려다가 갑작스러운 폭풍우를 만나 많은 선박과 군사를 잃고 후퇴하고 말았다. 결국 제1차 일본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원은 1279년(충렬왕 5) 남송(南宋)을 함락하여 중원을 완전히 통일한 기세를 타고 다시 제2차 일본 원정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 해 6월 원은 고려에 전함 900척을 짓도록 요구하였다. 고려의 조정은 도지휘사(都指揮使)를 경상도와 전라도에 보내 전함을 수조(修造)하게 하고 계점사(計點使)를 각도에 파견하여 공장(工匠)과 인부를 징발하였다. 이때 부안의 조선소에서 다시 전함이 건조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뒤 1281년(충렬왕 7) 5월 4만 명의 여원 연합군이 합포를 출발하면서 제2차 일본 원정이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3,500척의 전함과 남송인(南宋人)으로 편성된 10만 명의 강남군, 약 3만 명의 몽한병으로 구성된 동로군(東路軍), 그리고 김방경이 거느리는 약 1만 명의 고려군과 900여 척의 전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연합군은 구주 연안에서 적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나 무더위에 역병 환자가 속출한 데다 갑작스러운 태풍으로 2차 원정도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원 세조는 그 뒤에도 일본을 재차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다시 고려에 명을 내려 전함을 수리하고 전함 건조를 감독할 관리를 파견하였다. 이 일은 1294년(충렬왕 20) 정월 원 세조가 사망함으로써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지만, 그 동안 부안 지역 백성들은 크나큰 고통을 거듭 겪었다.

[나라의 재목창 변산과 조선술의 발전]

고려 시대의 문호(文豪) 이규보(李奎報)가 일찍이 말하였듯이 “변산(邊山)은 우리나라 재목(材木)의 창고였으며, 궁실을 짓고 고치느라 매년 이곳의 재목을 베었지만 몇 아름드리나 되는 나무와 하늘을 찌를 듯한 재목이 항상 수두룩하였다.”고 한다. 장흥(長興)의 천관산(天冠山)과 함께 목재가 풍부하였던 이 지역에 조선소(造船所)가 세워져서 운영되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부안 지역에는 또한 조창(漕倉)이 설치되었다. 지금의 보안면 영전리 제안포(濟安浦)에 설치되었던 안흥창(安興倉)이 그것이다. 조창에서는 조세미 등의 수납과 보관, 그리고 조운을 맡았으며, 판관이 조창의 업무를 총괄하였다. 중앙으로 운반할 때에는 최고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哨馬船)이 사용되었다. 안흥창은 임피 지역의 진성창(鎭城倉)과 함께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쌀들이 한데 모아지는 곳이었다. 이곳에 모아진 쌀들은 내륙 깊숙이 파고든 줄포만에서 조운선을 이용하여 중앙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제안포에서 머지않은 지금의 진서면에 조선소가 있었다.

조선소는 진서면 곰소항의 동쪽 구진(舊鎭)마을을 중심으로 한 검모포(黔毛浦)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변산의 바로 앞자락이라 목재를 조달하고 운송하는 데 편리하였을 뿐 아니라, 수군(水軍)의 진영(鎭營)이 있어 조선 사업을 추진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을 것이다. 요컨대 검모포는 목재가 풍부한 곳에 가까이 있을 뿐 아니라, 수군의 진영이 인근에 있으며 해로의 이용이 가능한 점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조선소로서의 훌륭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원 간섭기 몽고의 강요로 일본 정벌을 위한 전함 수백 척을 두 차례에 걸쳐 만들기도 하였다. 자연히 이곳에는 많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었다. 이처럼 보안현은 고려 시대, 특히 원 간섭기에는 부안 지역의 경제 중심지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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