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855
한자 天主敎
영어공식명칭 Roman Catholic
이칭/별칭 가톨릭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병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47년 - 최양업 신부 부안 첫 천주교 신자 확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5년 - 부안 지역 본당 등용본당에서 부안본당으로 변경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활동하는 로마 가톨릭교.

[부안 지역의 천주교 전래]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서 천주교 신자가 처음 확인된 것은 1847년(헌종 1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36년(헌종 2)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모방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한국명 나백다록(羅伯多祿), 1803~1839]이 같은 해 말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등 세 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그중 김대건 신부가 1845년(헌종 11)에 가장 먼저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했으나, 이듬해인 1846년(헌종 12)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어 1847년에는 최양업 부제가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프랑스 선교사의 순교에 대한 책임을 물으러 조선으로 가던 프랑스 함대에 통역관으로 동승하였다.

조선 해역에 진입한 프랑스 함대는 전라북도 부안 앞바다에서 접안을 시도하다가 고군산 신치도[현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신지도]에서 좌초하여 한 달 동안 섬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최양업 부제가 전라북도 부안의 대공소에서 온 신자를 만났고, 조심스레 이루어진 대화를 통해 39㎞쯤 떨어진 곳에 사는 자이며 온 가족이 신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최양업은 상해로 돌아가 신학교 교수인 신부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렸다. 대공소는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석포리[현 진서면 석포리]의 대소공소였고, 1882년(고종 19) 선교사들이 공소 방문 보고서 작성을 시작한 첫해에 확인된 공소이다.

1882년에는 대소공소와 함께 납틔공소[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장신리], 사창공소[보안면 남포리], 공작공소[백산면 죽림리]도 등장하며, 각각 21명, 22명, 58명이 고해성사를 본 것으로 보고되었다. 1883년(고종 20)에는 26명의 신자가 있는 만석동공소[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1885년(고종 22)에는 문서동공소[하서면 백련리]와 석상공소[하서면 석상리], 1886년(고종 23)에는 가는재공소[하서면 백련리], 1889년(고종 26)에는 불무동공소[변산면 중계리], 1890년(고종 27)에는 무내미공소[주산면 덕림리], 1893년(고종 30)에는 해창공소[하서면 백련리], 1894년(고종 31)에는 여름개공소[진서면 운호리] 등이 새로 등장한다.

불무동은 김대건 신부 당숙인 김재식이 처음 정착하여 그 일가로 마을을 이루었다. 지금은 김재식과 그 후손들의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 집안은 세 명의 성인과 두 명의 복자를 포함해 14명의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2002년 김해 김씨(金海金氏) 안경공파(安敬公派)에서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金震厚)를 중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 천주교 성인공파’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 시기 전라북도 부안 지역을 담당했던 선교사들은 1881년~1887년의 리우빌(Liouville)[한국명 유달영(柳達榮), 1855~1893], 1887년~1888년의 라푸르카드(Lafourcade)[1860~1888], 1888년~1892년의 베르모렐(J. Vermorel)[한국명 장약실(張若瑟), 1860~1937], 1893년~1894년의 죠조(Moyse Jozeau)[한국명 조득하(趙得夏), 1866~1894] 등의 신부들이었다.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공소들은 1888년 베르모렐 신부 때부터 배재본당[현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소속이 되었다. 1893년에는 베르모렐 후임으로 죠조 신부가 배재본당에 부임했으나,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 때 청나라 패잔병에게 살해되었다. 이어 1895년(고종 32)에는 라크루(Marcel Lacrouts)[한국명 구마슬(具瑪瑟), 1895~1929] 신부가 배재본당에 부임하여 본당을 배재에서 수류[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화율리]로 옮겼고, 부안의 공소들도 수류본당에 소속되었다. 이후 1910년(순종 4) 전라북도 정읍에 신성리본당[정읍군 내장면 신월리]이 설립되자 부안의 공소들도 신성리본당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본당 설립과 발전]

1910년대까지 전라북도 부안에서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은 곳은 무내미공소였다. 1890년 41명으로 첫 출발하여 1910년에는 180명까지 늘었다. 그러나 전라북도 부안에서 맨 먼저 사제가 부임하여 본당이 설립된 곳은 하서면 등용리[현 장신리]였다.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등용리는 1903년 김양배에 의해 천주교 신자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1910년까지 선교사가 방문한 적은 없었다. 김양배는 김재식의 손자로 김대건 신부의 조카뻘인데 부부가 평생 동정 생활을 하였다. 김양배는 불무동에서 화전을 일구고 담배 농사로 돈을 벌어 땅을 사서 기반을 닦았다. 그 후 등용리 일대 갈대밭을 매입하고 친척과 신자들을 불러들여 개척하였다.

김양배는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등용리에 성당을 짓고 사제를 유치하려는 꿈을 꾸었다. 이후 1918년 66.12㎡ 규모의 성당과 26.44㎡ 규모의 사제관을 짓고 난 후, 드망즈 주교로부터 축복식을 받아 등용공소가 설립되었다. 신자는 15가구 50여 명이었다. 1926년에는 등용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며 이기수 야고보 신부가 초대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고, 김양배는 평신도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신자 수는 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1933년에는 성당 내에 학술 강습소를 설치하여 60여 명의 학생들에게 초등 교육과 교리 교육을 하였다.

1935년에는 이기수 신부가 교세 확장을 위해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279[구 부안문화원 자리]로 본당을 옮겼다. 읍내 성당에서도 4년제 간이 학교를 세웠고, 적령이 넘은 학생을 모집하여 교육하다가 1941년 재정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1957년에는 이약슬 신부가 성당 신축을 위해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성당길 10[서외리 84-1]의 현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다. 이어 1959년 김종택 신부 때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963년 김영구 신부 때 현 성당을 완공하였다.

전라북도 부안의 천주교는 1960년대에 간척 사업 등 지역 개발 사업과 구제 사업으로 본당의 교세가 크게 신장되어, 1961년에 줄포공소, 1962년에 신복공소와 청호공소, 1964년에 마포공소가 각각 설립되었다. 1970년에는 부안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영세 농민을 돕고 상부상조하며 주민 복리 증진에 기여하였다. 1999년에는 줄포성당, 2010년에는 등용성당이 추가로 설립되었다.

[현황]

현재 전라북도 부안의 천주교 성당으로는 부안성당, 줄포성당, 등용성당 등 사제가 상주하는 본당 3개와 신자들끼리 운영하는 공소 4개가 있다. 부안성당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성당길 10[서외리 84-1]에 있으며, 신자 수는 709세대 1,204명이다. 소속 공소로는 돈지공소창북공소, 2개가 있다. 줄포성당은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부안로 877[줄포리 728-5]에 있으며, 신자 수는 199세대 353명이다. 소속 공소는 만석공소 하나가 있다. 등용성당은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등용길 13[장신리 59-3]에 있고, 신자 수는 176세대 421명이다. 소속 공소는 마포공소 하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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