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1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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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蝟島波市 |
영어공식명칭 | Widopasi|Wido Seasonal Fish Market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성식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포구에서 조기잡이 성행기마다 일시적으로 형성되던 대규모 어시장.
[개설]
위도 파시는 서해 칠산 바다에서 조기잡이가 성행할 때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포구에서 파시촌을 이루며 일시적으로 형성되는 대규모 어시장을 말한다. 파시는 주로 서해안에서 회유 어군을 따라 어장 주변의 해상이나 항포구에 형성되던 ‘바다의 시장’을 말한다. 대개는 곡우(穀雨), 입하(立夏)에서 단오(端午)를 전후한 시기에 형성되었는데, 회유 어종을 비롯한 어류 대부분이 산란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제주도 남쪽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가 산란을 위해 북상함으로써 본격적인 조기잡이가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위도 파시는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치도리와 파장금 포구에서 형성되었다. 위도는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와 함께 칠산 어장의 중심이 되는 어촌 지역이다. 칠산 어장은 전라남도 영광군 안마도(鞍馬島) 인근에서부터 송이도(松耳島), 낙월도(落月島), 칠산도와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및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飛雁島) 인근에 이르는 해역의 어장을 말한다. 칠산 어장에는 위도 파시 외에도 안마도, 낙월도, 송이도 등의 크고 작은 파시들도 형성되었다. 위도 파시는 어종에 따라 청어, 조기, 삼치, 전갱이, 키조개 등의 파시로 구분되었다.
[변천]
파시를 해상이나 항포구에 형성되는 어시장 정도로 설명하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이다. 파시가 열리면 어장 근처에 선원과 상인 등을 상대로 음식점, 숙박 시설, 위락 시설, 점포, 선구점 등이 들어서서 소위 파시촌이 형성되었고, 일부는 취락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파시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파시의 역사는 조선 시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영광군 편에 “조기는 영광군 서쪽 파시평에서 난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90년(고종 27) 『지도총쇄록(智島叢鎻錄)』에도 조기 어장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칠산 바다는 그 넓이가 100여 리[39㎞]에 이르고, 팔도의 배들이 모여들어 어망을 치는 배가 몇 백 척이요, 상선의 왕래 또한 수천 척에 이른다.”고 하였다.
위도가 서해안 칠산 어장의 대표적인 파시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된 요인은, 첫째 위도가 도서 지역이기는 하지만 육지와의 거리가 멀지 않아 어획된 물고기의 판로가 용이하고 주변에 줄포장 등의 큰 시장이 존재한다는 점, 둘째 위도가 오래 전부터 서해안의 대표적인 어업 전진 기지였다는 점, 셋째 조기, 청어, 삼치 등 어종이 풍부했다는 점 등이다. 위도가 다른 도서 지역과 달리 식수가 풍부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위도 파시가 형성된 포구로는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치도리와 파장금이 유명하였다. 파장금은 1990년대까지도 파시촌에서 시작된 유흥가를 비롯한 가건물들이 즐비하였다.
위도 파시의 변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조선 전기의 태동기를 지나 조선 후기는 조기와 청어를 주요 어종으로 하여 중개인의 규모가 커지면서 파시가 형성된 성립기로 볼 수 있다. 이어지는 일제 강점기는 위도 파시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당시 주요 어종은 조기, 부세, 고등어, 정어리 등이었고, 일본인들의 대거 참여와 어구 및 어로 기술의 발전, 다양한 유통 경로 확장 등으로 위도 파시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특히 일본으로부터 중선배로 불린 안강망 어선이 도입되어 어로수역이 연안으로까지 확장되었고, 개량된 어로 기술로 어획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광복 이후로는 어업의 영세화, 어족 자원의 고갈 등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쇠퇴기의 주요 어종은 조기, 삼치, 전갱이, 키조개, 꽃게 등이었다. 1970년대 이후로 위도 파시가 소멸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어족 자원의 고갈로 칠산 어장에서 더 이상 조기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