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411
한자 高麗 時代
영어공식명칭 Goryeo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정선용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 왕조 시기 충청남도 부여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부여 지역은 사실상 후삼국 통일과 함께 고려에 편입되었다. 고려는 지금의 부여 지역을 부여·임천·홍산·석성 등 4개의 군현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부여와 석성[현 부여군 석성면]은 이때 공주에 예속되어 있었고, 임천은 홍산[현 부여군 홍산면]과 함께 충청남도 서천 일대를 예속하면서 오늘날 부여 지역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부여]

충청남도 지역은 후삼국 시대에 후백제와 태봉 그리고 고려 사이에 치열한 영역 다툼이 펼쳐졌던 곳이다. 옛 백제의 수도 웅진과 사비가 있었던 웅주[현 충청남도 공주] 지역은 궁예 말년에 이흔암(伊昕巖)[?~918]이 지키고 있었고 부여 지역은 후삼국 통일 직전까지 대부분이 후백제의 권역에 속하여 있었다. 936년(태조 19) 9월 후백제의 제2대 왕 신검(神劍)[?~?]이 황산군[현 충청남도 논산시] 마성에서 고려에 항복하면서 비로소 고려의 영역이 되었다.

고려 태조는 불교를 매개로 하여 후백제인들을 교화하고자 연산[현 충청남도 논산시]에 개태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후백제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임천의 부여 가림성유금필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유금필은 가난한 후백제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진휼하는 등 유화적인 민심 수습책을 펼치며 후백제인들을 통합하였다. 임천 지역 주민들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뒷날 가림성 안에 임천 유태사 묘를 세우고 유금필의 제사를 받들었다.

[고려 시대 부여의 행정 구역]

부여 지역은 고려 시대에 부여·임천·홍산·석성 등 4개의 군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백제의 도성이었던 부여는 신라 시대에는 석산현[현 부여군 석성면]과 열성현[현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을 영현(令縣)으로 거느린 군(郡)이었다. 고려에서는 신라 시대 석산현이었던 석성현과 신라 시대 열성현이었던 정산현[현 충청남도 청양군]을 포함하여 모두 1018년(현종 9) 이래로 공주의 속군과 속현으로 예속시켰다.

부여군과 함께 석성현에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후 석성현은 감무를 없애고 1371년(공민왕 20)에 부여감무가 겸임하다가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감무가 파견되었다. 반면, 신라 시대에 한산현(翰山縣)[현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과 마산현(馬山縣)[현 충청남도 서천]을 영현으로 거느리던 가림군[현 부여군 임천면]은 995년(성종 14)에 잠시나마 임주자사(林州刺史)로 승격되었다.

1018년(현종 9) 이후 가림군은 다시 가림현으로 강등되었지만, 홍산현한산현뿐만 아니라 새롭게 서림군[현 충청남도 서천군]과 비인현[현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그리고 남포현[현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까지 1개의 속군과 4개의 속현을 거느리며 현령관으로 승격되었다.

서림군은 1314년(충숙왕 1)에 지서주사(知西州事)로 승격되었지만, 가림현은 감무가 1175년(명종 5)에 파견된 한산현과 그 뒤에 감무가 파견된 비인현[현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남포현[현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그리고 한산현의 감무가 겸하였던 홍산현[부여군 홍산면]까지 계속하여 예속한 상태였다.

가림현은 1315년(충숙왕 2)에는 원나라의 평장사(平章事) 아패해(阿孛海)의 처 조씨(趙氏)의 본관이라 하여 다시 지임주사(知林州事)로 승격되었다. 이후 1413년 임천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부여군으로 편입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부여 지역에 이외의 특수 행정 구역도 다수 있었다. 임천현에는 안량부곡과 고다지소·소라소·금암소, 금물촌처가 있었다. 홍산현에는 비도소와 오합소가 있었으며, 부여현에는 석전부곡과 풍지소가 있었다.

[고려 시대 부여의 불교]

고려 시대 부여의 불교에서 주목되는 점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본뜬 백제식 석탑들이 많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본뜬 백제식 석탑으로는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에 있는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이 대표적이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있는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도 백제식 석탑의 변형된 형태라고 한다.

백제식 석탑들이 많이 세워진 것은 고려 시대에 나타난 백제 문화의 부흥을 위한 노력으로 평가된다. 1942년 부여 정림사지에서 ‘대평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大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當草)’라는 명문을 새긴 기와가 발굴되었는데, 기와를 통하여 확인한 1028년(현종 19) 정림사의 중창도 백제 문화의 부흥을 위한 노력으로 이해된다.

고려 시대에 번창하였던 부여의 대표적 사찰로는 임천면 구교리대조사외산면 만수리무량사가 있다. 대조사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높이 10m의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과 삼층 석탑인 대조사석탑[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을 통하여 고려 초부터 존재하였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부여 지역 최대의 사찰인 무량사 극락전 앞에 우뚝 선 7.5m의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보물]과 부여 무량사 석등[보물], 무량사당간지주[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를 통하여 불교가 고려 시대에 얼마나 번창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는 성주산에 있던 보광사(普光寺)가 부여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이었음을 1358년(공민왕 7) 원나라의 위소(危素)가 지은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는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라는 명칭으로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에 따르면 원명국사(圓明國師) 충감(沖鑑)[1274~1338]이 말년에 중창하고 머문 보광사에 문도 3,000명이 모여들었다고 하며, 문도들을 위한 거주 시설도 100칸에 달하였고, 노비가 100명에 전답도 100경[약 99만 1735㎡]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려 말 왜구의 침략]

부여 지역에는 고려 후기 전국을 유린하였던 왜구의 침탈이 우왕 대[재위 1374~1388]에 총 10여 차례나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왜구 침입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1376년(우왕 2) 7월에 부여를 약탈한 왜구가 공주까지 함락하고 석성과 연산의 개태사까지 도륙한 사건이다. 이때 양광도원수(楊廣道元帥) 박인계(朴仁桂)가 전사하자 개경에서 최영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하였다.

또한 1380년(우왕 6) 7월에는 왜구가 다시 부여와 홍산 등을 크게 약탈하였는데, 1380년 8월에는 금강 하구의 진포해전에서 최영이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양광도원수 김사혁(金斯革)이 임주에서 왜구 46명을 붙잡아 참수하였다. 이후 부여 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략은 점차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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