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8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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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興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기섭 |
활동 시기/일시 | 660년 - 흥수 백제 좌평 역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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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660년 - 흥수 백제 고마미지현에서 귀양살이 |
추모 시기/일시 | 1957년 - 흥수 삼충사 배향 |
유배|이배지 | 고마미지현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
사당|배향지 | 삼충사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40-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대표 관직 | 좌평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의열사·삼충사·팔충사(八忠祠)에서 제향하고 있는 백제 말기의 충신.
[활동 사항]
흥수(興首)[?~?]는 백제 의자왕 때 제1품 좌평을 지낸 충신이다. 사비의 중앙 부서에서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흥수는 위기를 맞은 의자왕이 귀양지로 사람을 보내 의견을 구한 만큼, 의자왕 즉위 초 왕권 강화를 위하여 성충(成忠)과 함께 적극 노력한 인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28 백제본기에 660년(의자왕 20) 당나라 군사 13만 명과 신라의 정예 군사 5만 명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왕도에 접근하였을 때 의자왕이 어찌 할 바를 몰라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던 좌평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대책을 물었는데, “흥수가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고 군사의 규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앞뒤에서 치려고 하니 만약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우리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 있어도 1만 명이 당할 수 없으니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가려내어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사람이 탄현을 지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 성문을 굳게 닫고 단단하게 지키며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해질 때를 기다린 뒤에 분발하여 공격하면 이길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오랫동안 갇혀 있었기에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를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물 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를 탄현으로 올라오게 하여 좁은 길 때문에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이럴 때 군사를 풀어 공격하면 마치 닭장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마미지현은 대체로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으로 비정된다.
[상훈과 추모]
흥수는 의열사(義烈祠)와 삼충사(三忠祠), 충화 팔충사(忠化 八忠祠)에서 제향하고 있다. 1575년 건립된 의열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으며, 백제의 성충과 함께 흥수(興首)와 계백(階伯), 고려의 이존오(李存吾)를 제향한다. 삼충사는 1957년 충청남도 부여군이 부여읍 쌍북리에 건립하였으며, 성충과 함께 흥수와 계백을 제향한다. 팔충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에 있는 백제 8충신 등을 모신 사당으로 1980년 부소산에 있던 삼충사의 건물을 옮겨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