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7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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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이근호 |
활동 시기/일시 | 656년 - 성충 간언하다 투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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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575년 - 성충 의열사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957년 - 성충 삼충사 배향 |
사당|배향지 | 삼충사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
사당|배향지 | 의열사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의열로29번길 11-33[동남리 산3]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대표 관직 | 좌평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의열사, 삼충사, 팔충사에서 제향하고 있는 백제 말기의 충신.
[활동 사항]
성충(成忠)[?~656]은 의자왕 초기부터 국왕을 보필하였다. 백제의 제1관등인 좌평(佐平)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사비의 중앙 부서에서 책임자를 맡아 정무의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성충은 656년(의자왕 16) 국왕이 궁인(宮人)들과 사치와 향락에 빠져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자 적극 간언을 하다가, 의자왕의 노여움을 사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단식하다가 사망하였는데, 죽음을 앞두고 의자왕에게 글을 올렸다.
성충은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죽기 전에 한마디 말한다고 하며, 전쟁이 일어날 것이므로 군사를 움직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군사를 움직일 때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므로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보전할 수 있다고 하면서, 혹시 외적이 침입하면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기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침현은 지금의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 탄현(炭峴)으로 추정된다. 의자왕은 성충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지 않았는데, 결국 신라군은 탄현으로, 당나라군은 기벌포로 들어와 사비성을 장악하였다. 백제가 멸망의 순간을 맞이하자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태자 부여효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상훈과 추모]
성충은 의열사(義烈祠)와 삼충사(三忠祠), 팔충사(八忠祠)에서 제향하고 있다. 1575년 건립된 의열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으며, 백제의 성충과 함께 흥수(興首)와 계백(階伯), 고려의 이존오(李存吾)를 제향한다. 삼충사는 1957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건립하였으며, 성충과 함께 흥수와 계백을 제향한다. 팔충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에 있는 백제 8충신 등을 모신 사당으로 1980년 부소산에 있던 삼충사의 건물을 옮겨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