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1139
한자 忠定祠
영어공식명칭 Chungjeongsa shrine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금천로318번길 37-29[내곡리 산20-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인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이전 시기/일시 1800년대 - 충정사 이건 추정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9년 - 충정사 중건
현 소재지 충정사 -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금천로318번길 37-29[내곡리 산20-1]지도보기
원소재지 충정사 -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지도보기
성격 사당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3칸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내곡리에 있는 성희안과 성률을 모신 조선 후기 사당.

[개설]

충정사(忠定祠)는 인재(仁齋) 성희안(成希顔)[1461~1513]과 아들 성률(成瑮)[1490~?]을 모신 사당이다. 성희안은 148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갔다. 연산군 때 형조참판이 되어 가선대부에 올랐고, 이조참판으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을 풍자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가 무관 말단직인 부사용으로 좌천되었다. 1506년 반정을 도모하여 성공하자 거사의 주역으로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창산군(昌山君)에 봉하여졌다.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이 되어 『연산군일기』 편찬을 주관하였고,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군무를 총괄하였다. 1513년(중종 8)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며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성률도 중종반정 때의 공로로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527년(중종 22) 통정대부로 춘천부사, 부평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의 총애를 얻어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창산군 오위장에 이르렀다.

[위치]

충정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금천로318번길 37-29[내곡리 산20-1]에 있다.

[변천]

충정사는 원래 부여군 은산면에 있었는데 불에 타 버리자 1800년대 초반 남면 내곡리로 옮겨 세웠고, 1989년 중건하였다.

[형태]

충정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 구조의 맞배지붕 건물의 사당과 솟을삼문으로 된 묘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황]

충정사는 중종반정이 있었던 음력 9월 1일 제사를 지냈으나 현재는 매년 음력 10월 10~20일 사이 일요일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 충정사는 조선 시대 공신인 성희안과 성률 부자의 절의를 기리는 사당으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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