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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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歡戰鬪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내수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94년 7월 28일 - 성환 전투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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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
성격 | 국제 전쟁 |
관련 인물/단체 | 섭사성 |
[정의]
1894년 청일 전쟁 중에 천안 지역에서 발생한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투.
[개설]
청일 전쟁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국 중심 질서에 마침표를 찍고 신흥 강국인 일본이 새롭게 지역의 패권을 움켜쥐는 계기가 된 전쟁이었다. 또한 당시 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들 간에 영토 분할 경쟁이 촉발된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1884년 갑신정변으로 청나라와 일본은 톈진 조약을 맺어 양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되면 상대국에 통보하기로 하였다. 이후에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정부는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조선에 내정 개혁안을 제시하는 한편, 톈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에 정부는 동학 농민군과 전주 화약을 맺어 청일 양국 군대에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 군대에 선제공격을 하면서 청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경과]
청의 군대는 섭지초(葉志超)의 지휘 아래 3천여 명의 병력이 아산만에 주둔하고 있었다. 청군은 두 개 부대로 편성하여 하나는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인 성환 지역에 방어진을 구축하였고, 다른 한 부대는 공주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일본군은 성환 지역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성환 지역의 방어 부대는 섭사성(聶士成)이 지휘하였다. 섭사성은 지금의 성환역 동북쪽에 있는 월봉산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일본군은 성환역에서 멀지 않은 소사평에 도착하였고, 양력으로 1894년 7월 28일 새벽에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결과]
병력을 두 개 부대로 나눈 청군은 일본군의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서울에서 남하한 일본군이 청군을 공격한 지 4시간 만에 성환을 점령하자, 청군은 아산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전투원은 일본군이 보병 3,000명, 기병 47명, 청군이 보병 3,400명이었고 사상자는 일본군이 820명, 청군이 500명이었다. 결국 섭사성은 공주의 섭지초 군대와 합류하여 청주를 거쳐 평양으로 달아났다.
이 전투에서 전체 병력의 1/7을 잃은 청군은 평양으로 후퇴하여 일본군과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8월 1일에 양국은 공식적으로 선전 포고를 하여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평양 전투에서도 청군이 궤멸되어 결국 청일 전쟁은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의의와 평가]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일방적으로 승리함으로써 대한 제국·청·일본 등의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는 일본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대한 제국은 갑오개혁이라는 제도 개혁을 진행함으로써 전통적인 지배 체제가 약화되었고 동학 농민 운동 등 반일 민중 운동도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반면에, 일본은 청일 전쟁의 결과로 대만 등 중국의 영토를 식민지로 확보하였고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제국주의 국가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청나라는 열강들이 벌이는 격렬한 제국주의적 분할 경쟁에서 한낱 대상국으로 전락하였고 대내외적으로 왕조의 붕괴를 재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