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20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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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기싸움,깃대 싸움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성복 |
[정의]
충청남도 천안 지역에서 두레를 조직해 김매기를 할 때 두 마을 사이에서 벌어지는 농기싸움.
[개설]
예전에는 김매기 철이 오면 마을마다 두레를 조직하여 김매기를 했다. 이때 이웃한 두 마을의 두레패가 농기를 들고 이동을 하다가 마주치면 서로 먼저 인사를 하라고 시비를 벌이다가 두레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천안 지역에서는 기싸움(旗싸움), 깃대 싸움이라고도 한다.
[연원]
두레 싸움의 연원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두레의 공동 노동이 조선 시대 후기 이앙법의 보급과 함께 성립된 관행임을 생각하면 벼농사를 주로 하는 삼남 지역을 중심으로 두레가 널리 확산되는 17~18세기의 산물로 추정된다. 천안 지역에서도 두레 싸움의 관행이 폭 넓게 확인된다.
두레 싸움은 대개 이웃한 두 마을의 두레 조직 간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전에 두레 조직은 농기를 만든 시기나 마을의 규모 혹은 반상에 따라 으레 ‘형 두레’와 ‘아우 두레’ 또는 ‘선생 두레’와 ‘제자 두레’로 서열이 정해졌다. 따라서 두 마을의 두레패가 길을 가다가 마주치면 상대적으로 서열이 낮은 두레패가 형 두레나 선생 두레에 예를 갖춰서 기세배를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만일 이를 거역하거나 세력이 비슷한 두레패가 만나면 으레 격렬한 두레 싸움이 벌어진다.
[놀이 도구 및 장소]
천안 지역에서 행해졌던 두레 싸움은 상대편의 꿩 장목[꿩의 꽁지깃]을 먼저 빼앗는 마을이 승자가 된다. 천안 지역의 두레 농기는 기폭에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나 ‘신농유업(神農遺業)’을 묵서(墨書)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마을에 따라서는 용을 그려 넣기도 했는데, 그 형태와는 무관하게 농기의 꼭대기에는 꿩 장목을 꽂아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레 싸움은 결국 누가 먼저 이 꿩 장목을 뽑거나 부러뜨리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관건이다.
두레 싸움은 두레를 조직해서 일을 하는 일터에서 주로 행해졌다. 농사철에 일터에 두레 농기를 꽂아 두고, 일을 끝내고 돌아갈 때도 기를 앞세웠다. 그래서 두레 싸움은 웃말과 아랫말이 연결되는 지점이나 논둑길 등에서 많이 벌어졌다.
[놀이 방법]
충청남도 천안시의 여러 마을의 기싸움을 통해 두레 싸움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천안시 성성동 영성 마을에서는 두정동과 종종 두레 싸움을 했다. 김매기 철이 돌아와 두 마을이 맞두레가 나면 영기를 들고 상대편에게 가서 시비를 건다. 만일 상대가 싸움을 피하려는 기색이 보이면 농기를 앞세우고 와서 절을 세 번 하고 가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약이 오른 상대편도 무리한 요구를 참지 못하고 급기야 두레 싸움이 벌어진다. 두레 싸움은 상대의 농기를 쓰러뜨린 뒤 꿩 장목을 빼앗아 자기편 농기에 꽂으면 이긴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두레 싸움은 매우 격렬한 양상을 띠기 마련이었다.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 신갈리에서도 이웃 마을과 맞두레가 났을 때 두레 싸움이 벌어진 적이 있다. 들판에 늦게 도착한 마을은 먼저 농기를 꽂아 놓은 마을에 기세배를 하고 지나가는 것이 관례인데, 이를 거부하면 두레 싸움이 일어났다.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해정리 엄정말과 바리미는 넓은 벌판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한 마을이었다. 예전에 두레가 조직되면 농기를 꽂아 놓고 논을 매러 갔는데, 군대의 전초병처럼 힘센 장정이 농기를 지켰다.
엄정말 촌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예전에 바리미와 두레 싸움이 났을 때 홍 장군이라는 사람이 농기를 잡고 있었는데, 상대 마을 두레꾼이 꿩 장목을 빼앗기 위해 등 뒤에서 호미로 어깨를 찍었다고 한다. 그런 험악한 와중에서도 홍 장군은 한 손으로 농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을 찍은 사람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집어던졌다고 한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홍 장군이라는 것이다.
엄정말과 바리미의 두레 싸움은 남양 홍씨 집성촌인 엄정말이 이겼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까지도 해마다 음력 정월 14일이 되면 바리미의 풍물꾼들이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면서 엄정말로 와서 기세배를 하고 함께 합굿을 펼치며 하루를 놀았다고 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두레 싸움은 단순히 꿩 장목을 뺏기 위한 집단 놀이가 아니라 마을과 마을이 자웅(雌雄)을 겨루는 일종의 패싸움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 피차 마을의 자존심이 달려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왕래가 잦은 이웃 마을이지만 한번 두레 싸움이 시작되면 죽기 살기를 각오하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풍물을 뺏거나 찢는 것은 물론 서로 주먹다짐까지 벌이는 것이 예삿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승부가 나면 꿩 장목을 돌려주고 패한 마을은 이긴 마을의 농기를 향해 기폭을 숙여 기세배를 한 다음 한바탕 흥겹게 풍물놀이를 했다.
[현황]
천안시에서 행해지던 두레 싸움은 두레의 역사와 함께 한다. 두레는 일제 강점기 말부터 8·15 해방에 이르기까지 어렵게 전승되어 오다가 1950년대 말에 대부분 사라졌다. 또한 농업의 기계화로 두레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두레 싸움의 전승도 중단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