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0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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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東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91년 1월 6일 - 김동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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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김동주 청도군 운문면 일제경찰 구타 의거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2일 - 김동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요 및 공무 집행 방해죄로 기소 |
몰년 시기/일시 | 1929년 11월 14일 - 김동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김동주 대통령 표창 추서 |
관련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청도군 운문면 만세 운동 |
출생지 | 김동주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동 |
활동지 | 김동주 활동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청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동주는 1891년(고종 28)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新院里)에서 출생하여 1929년 사망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청도군 운문면 일제 경찰 구타 의거에 참가하였다.
[활동 사항]
청도군 운문면에서는 1919년 3월 18일 김상구(金相久)·김종태(金鍾台)·김진효(金鎭孝)·손기현(孫琪鉉) 등에 의해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월 19일 오후 6시경 청도 경찰서로부터 순사 삼상유삼(三上有三), 순사보 박춘학(朴春鶴)·하삼금(河三金)·박무석(朴武錫)·이병관(李秉觀) 등 5인이 신원리로 들어 왔다. 전일 만세 시위의 주동 인물인 김종태와 김상구 외 6인을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만세를 부르고 어디론가 피신한 뒤였다.
일경들은 김상구와 김종태 등을 찾지 못하자, 김상구의 어머니를 문명 학교로 연행하려 하였다. 이를 목격한 김의택(金義澤)과 김병준(金秉濬)은 일경들에게 항의하고 동민들을 불러 모았다. 또 강성봉(姜聖鳳)은 조선인 순사보에게 “너희들도 한인이 아니냐. 만세를 부르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냐.”라고 항의하였다. 김병준을 비롯한 동민들이 조선인 순사보 박춘학의 행동을 저지하자, 순사보 박무석·이병관 등이 합세하여 김병준을 구타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목격한 동민들은 이병관과 박무석을 구타하고, 또 이를 보고 달려온 삼상유삼(三上有三)까지 구타하였다. 곁에 있던 동민 약 40명은 이 광경에 분노하여 경찰들을 포위하고 곤봉 세례를 퍼부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김석곤은 나팔을 불었고, 소리를 들은 동민 약 300명이 모여들었다. 이에 일경들은 권총 2발을 발사하면서 도망쳤다.
김동주(金東柱)[1891∼1929]를 비롯한 김의택·강성봉·김한구(金漢九)·김주한(金周翰)·전도지(全道知)·김병형(金秉瀅) 등은 1919년 5월 2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요 및 공무 집행 방해죄로 기소되었다. 김동주는 징역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