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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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周翰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75년 11월 7일 - 김주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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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김주한 청도군 운문면 일제 경찰 구타 의거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2일 - 김주한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요 및 공무 집행 방해죄로 기소 |
몰년 시기/일시 | 1947년 6월 8일 - 김주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1년 - 김주한 애족장 추서 |
관련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청도군 운문면 만세 운동 |
출생지 | 김주한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동 |
거주|이주지 | 김주한 거주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동 |
활동지 | 김주한 활동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청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주한은 1875년(고종 12)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新院里)에서 출생하여 1947년 사망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청도군 운문면 일제 경찰 구타 의거에 참가하였다.
[활동 사항]
청도군 운문면에서는 1919년 3월 18일 김상구(金相久)·김종태(金鍾台)·김진효(金鎭孝)·손기현(孫琪鉉) 등에 의해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3월 19일 오후 6시경 청도 경찰서로부터 순사 삼상유삼(三上有三), 순사보 하삼금(河三金)·박춘학(朴春鶴)·이병관(李秉觀)·박무석(朴武錫) 등 5인이 신원리로 들어 왔다. 전일 만세 시위의 주동 인물인 김종태와 김상구 외 6인을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어디론가 피신한 뒤였다.
일제 경찰들은 김종태와 김상구 등을 찾지 못하자, 김상구의 어머니를 문명 학교(文明學校)로 연행하려 하였다. 이를 목격한 김의택(金義澤)과 김병준(金秉濬)은 경찰에게 항의하고 동민들을 모았다. 또 강성봉(姜聖鳳)은 조선인 순사보에게 “너희들도 조선인 아니냐. 만세를 부르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냐?”라고 항의하였고, 김의택과 김병준 등은 일경들을 저지하며 동민을 불러 모았다. 이때 조선인 순사보 박춘학이 김병준 등에게 저지당하자, 순사보 박무석과 이병관 등이 합세하여 김병준을 구타하기 시작하였다. 김병준이 매를 맞는 것을 본 김주한(金周翰)[1875∼1947]과 강성봉·김한구(金漢九)·김동주(金東柱) 등의 동네사람들은 박무석과 이병관을 구타하였고, 또 이를 보고 달려 온 삼상유삼도 곤봉으로 구타하였다. 어느 사이 약 40명의 동민들이 일제 경찰들을 포위하여 곤봉 세례를 가하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김석곤이 나팔을 불었고, 소리를 들은 동네사람들 약 300명이 모여들었다. 이에 일제 경찰들은 권총 2발을 발사하면서 도망쳤는데, 이때 김주한은 총탄에 맞았다.
김주한을 비롯한 김의택·강성봉·김한구·김동주·전도지(全道知)·김병형(金秉瀅) 등은 1919년 5월 2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요 및 공무 집행 방해죄로 기소되었다. 김주한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01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