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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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基鉉 |
이칭/별칭 | 덕송(德松)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84년 5월 26일 - 손기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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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0년 12월 - 손기현 문명 학교 한문 교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손기현 청도군 운문면 만세 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2일 - 손기현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징역 2년 언도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9월 25일 - 손기현 고등 법원에서 징역 1년 확정 |
몰년 시기/일시 | 1946년 2월 17일 - 손기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손기현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손기현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
학교|수학지 | 보성 전문학교 -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 5가 1 |
활동지 | 손기현 활동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청도군 운문면 만세 운동 주도 |
[정의]
일제 강점기 청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손기현은 1884년(고종 21)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新院里)에서 출생하여 1946년 사망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청도군 운문면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8일 전개된 운문면 만세 운동은 문명 학교(文明學校) 졸업생 및 교사들이 주동하였다. 당시 문명 학교 졸업생 김상구(金相久)는 김종태(金鍾台)와 함께 3월 1일 광무 황제(光武皇帝)의 국장을 참배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귀향하였다. 3월 10일 김종태의 집에서 서울의 만세 운동을 보고하고, 운문면에서도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손기현(孫基鉉)[1884∼1946]은 3월 15일 밤 김재화(金在華)와 함께 박창기(朴昌淇)의 집에서 만나 만세 운동에 대하여 논의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격문 20여 매를 작성하고, 이날 밤 방음(芳音)·대천(大川)·순지(蓴池)·오진(梧津) 등지에 부착하였다. 또 17일 밤에는 김진효(金鎭孝)·손한조(孫漢祚)·김용구(金龍久)·김상구·홍해성(洪海性)·김종식(金鍾軾)·김종수(金鍾秀) 등과 함께 문명 학교에 모였다. 손기현은 이 자리에서 그들에게 『매일 신보(每日申報)』를 보여 주면서 전국적으로 만세 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니, 이에 호응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김용구와 김종수가 문명 학교의 존폐를 우려하여 신중론을 폈으나, 학교의 존재보다는 조국의 독립이 우선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3월 17일 밤 손기현을 비롯하여 김진효·김상구·손한조·홍해성 등은 문명 학교에 모여 만세 운동을 촉구하는 등 만세 운동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런데 3월 15일 밤에 김재화와 손기현 등이 격문을 만들어 부착한 사건과 관련하여, 김진효·김종태·김상구·강재식(姜在植)·김종식·홍용팔(洪龍八)·홍해성·김대선(金大善) 등이 운문 주재소로 연행되었다. 이들은 운문 주재소에서 취조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동행한 동료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운문면사무소로 이동하여 각자 1자씩 ‘대한 독립 만세(大韓獨立萬歲)’라 쓰고, 여기에 ‘독립회(獨立會)’라 씀으로써 ‘대한 독립 만세’ 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김진효의 개회와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운문면 각 동리를 누비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손기현도 그들과 함께 시위행진을 벌였다.
3월 19일 운문면 만세 운동의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청도 경찰서 일본인 순사 및 조선인 순사보 5인이 신원리로 출동하였으나 일제 경찰은 동민들에게 구타당하고 퇴각하였다. 이어 3월 20일 대구 헌병 분대 헌병 3명과 청도 경찰서장 이하 5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벌였는데, 이때 손기현도 체포되었다.
손기현은 1919년 5월 2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징역 2년을 언도받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1919년 7월 5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기각, 1919년 9월 25일 고등 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