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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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起胤 |
이칭/별칭 | 이용석(李用石)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청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기윤은 1898년(광무 2)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태어나 1938년 사망하였다. 1919년 3월 30일 대구 덕산 시장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이기윤(李起胤)[1898∼1938]은 1919년 당시 달성군(達城郡) 공산면(公山面) 도학동(道鶴洞)에 있는 동화사(桐華寺) 지방 학림(地方學林)의 학생이었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불교 중앙 학림 학생 윤학조(尹學祚)가 경성의 3·1 운동에 참가한 후 고향으로 내려왔다. 윤학조는 이기윤을 비롯한 권청학(權淸學)·김문옥(金文玉) 등과 만난 자리에서 동화사 지방 학림에서도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모두 찬성하고 대구 덕산정 시장에서 만세 운동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28일 동화사 심검당(尋劒堂)에 모여 3월 30일 덕산정 시장에서 거사하기로 약속하고, 비밀리에 태극기 등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3월 29일 9명의 학생 대표들이 동화사를 떠나 대구부 덕산정에 있는 동화사 출장소 김상의(金尙儀)의 집에서 시위 준비를 하였다. 드디어 3월 30일 오후 2시 이기윤을 비롯한 권청학과 김문옥 등은 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에게 미리 준비한 태극기 등을 나눠주고,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일으켰다.
이기윤은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1919년 4월 12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10개월을 언도받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5월 19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었으나, 다시 상고하여 7월 3일 고등 법원에서 상고가 기각,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2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