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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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雲龜 |
이칭/별칭 | 최현구(崔鉉九)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지촌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8월 23일 - 최운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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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2년 3월 11일 - 최운구 조선 혁명군 중대장으로 활약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3월 - 최운구 신빈현성 일본 수비군과 전투를 벌여 영릉가성을 점령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3월 - 최운구 일본군과 싸워 흥경현성 탈환 |
몰년 시기/일시 | 1942년 9월 10일 - 최운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최운구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최운구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지촌리 |
활동지 | 최운구 활동지 - 중국 요녕성 신빈현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만주 조선 혁명군 중대장 |
[정의]
일제 강점기 청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운구는 1885년(고종 22)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지촌리에서 출생하여 1942년 사망하였다. 1930년대 만주에서 조선 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휘하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활동 사항]
최운구(崔雲龜)[1885∼1942]는 1932년 3월 11일 조선 혁명군 중대장으로서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참모장 김학규(金學奎), 중대장 조화선(趙化善)·정봉길(鄭鳳吉) 등과 함께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조선 혁명군은 1929년 12월 29일 중국 요녕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에서 민족 유일당 조직 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을 바탕으로 창건된 남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정당인 조선 혁명당(朝鮮革命黨) 산하의 독립군이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조선 혁명당은 종래의 독자적인 투쟁 방식을 탈피하여 중국인들과 연합 작전을 모색하면서 한·중 연합군으로 조직되었다. 조선 혁명군은 1932년 10월까지 남만주 일대에서 200여 차례의 많은 전투를 치르며 크게 활약하였다. 1932년 3월 조선 혁명군은 신빈현성 일본 수비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영릉가성(永陵街城)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전한 일본군이 흥경성(興京城)을 거점으로 복수전을 기도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조선 혁명군은 1933년 3월 중국 의용군과 함께 즉시 흥경성 공격 작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영릉가성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흥경현성(興京縣城)에서 주력 부대가 참전하고 비행기까지 동원하였으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조선 혁명군은 일본군을 격파하고 흥경성도 탈환하였다.
그러나 1934년 9월 조선 혁명군 사령과 총사령 양세봉이 피살된 후 일제의 회유와 탄압 작전, 집단 부락의 설치 등으로 독립운동의 기반이었던 한인 사회와 급격히 유리되면서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에 조선 혁명당은 비상조치를 강구하여 국민부와 조선 혁명군을 통합하여 조선 혁명군 정부(朝鮮革命軍政府)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1936년 12월 당의 핵심 이론가 고이허가 체포되어 피살되었고, 1937년 5월 조선 혁명군 정부 총령 김동산도 일제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투항하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조선 혁명군의 최운구는 주요 간부 박대호(朴大浩) 등 60여 명의 대원들과 함께 1938년 3월 중국 공산당 계열의 동북 항일 연군(東北抗日聯軍)에 합류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