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1139
한자 洪宙一
이칭/별칭 해동(海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6년연표보기 - 홍주일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8년 - 홍주일 동경의 정칙 예비 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08년 9월 - 홍주일 달성 친목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5년 음력 1월 15일 - 홍주일 조선 국권 회복단 중앙 총부 조직하고 기밀 부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16년 8월 - 홍주일 대구 권총 사건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7년 6월 - 홍주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5개월 선고받고 복역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3일 - 홍주일 만세 운동을 계획하다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홍주일 교남 학교 설립
몰년 시기/일시 1927년연표보기 - 홍주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홍주일 건국 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홍주일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홍주일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지도보기
학교|수학지 홍주일 수학지 - 일본 도쿄
활동지 홍주일 활동지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3·1 운동 참가|조선 국권 회복단|달성 친목회

[정의]

일제 강점기 청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홍주일은 1876년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梧津里)에서 출생하여 1927년 사망하였다. 1908년 달성 친목회, 1915년 조선 국권 회복단,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1년 교남 학교(嶠南學校)를 설립하고 항일 사상을 고취하였다.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해동(海東).

[활동 사항]

홍주일(洪宙一)[1876∼1927]은 31세에 일본 규슈[九州] 구마모토[熊本]에 유학하여 어학을 6개월 배우고, 32세에 도쿄 연수 학관(硏修學館)에서 수학을 3∼4개월 배우다가 귀국하였다. 그 후 평안북도 백마군 옥천 학교(玉川學校)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평양에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지하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33세에 다시 도쿄로 들어가 정칙 예비 학교(正則豫備學校)[동경 문리 전문학교(東京文理專門學校)]를 졸업하고 1년 만에 귀국하여, 경북 예안의 사립 학교, 경남 구포의 구명 학교(龜明學校) 등을 거처 대구 협성 학교(協成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1908년 9월 대구에서 결성된 달성 친목회(達城親睦會)에 참여하는 한편 우현 서루(友弦書樓)에 달성 친목회 부설 강유원(講遊園)을 개설하고 신학문을 지도하는 등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달성 친목회 회원으로 서상일(徐相日)과 관련을 맺으면서 서상일이 경영하던 태궁 상회(太弓商會)의 점원이 되었다.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라는 명목으로 윤상태(尹相泰)·서상일·이시영(李始榮) 등과 조선 국권 회복단 중앙 총부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기밀 부장을 역임하였다. 광복회에도 관여하여 1916년 8월 대구 권총 사건에 참여하였다가 1917년 6월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5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의 이갑성(李甲成)과 연락을 취하고, 김태련(金兌鍊)·이만집(李萬集) 등과 대구에서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3월 3일 일제의 예비 검속으로 체포되어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또 1921년에는 김영서(金英瑞)·정운기(鄭雲騏) 등과 함께 교남 학교를 설립하고 항일 사상을 고취하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교직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 포장,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