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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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海性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 홍해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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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홍해성 청도군 운문면 만세 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2일 - 홍해성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9월 25일 - 홍해성 고등 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49년 - 홍해성 사망 |
출생지 | 홍해성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
활동지 | 홍해성 활동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청도군 운문면 만세 운동 |
[정의]
일제 강점기 청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홍해성은 1895년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에서 출생하여 1949년 사망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청도군 운문면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활동 사항]
홍해성(洪海性)[1895∼1949]은 1919년 3월 18일 운문면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운문면 만세 운동은 3월 1일 광무 황제(光武皇帝)의 국장을 참배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귀향한 김상구(金相久)과 김종태(金鍾台)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1919년 3월 15일 밤 손기현(孫琪鉉)과 김재화(金在華)는 함께 박창기(朴昌淇)의 집에서 만나 만세 운동에 대해 논의하고, 격문 20여 매를 작성하여 밤을 틈타 방음(芳音)·대천(大川)·순지(蓴池)·오진(梧津) 등지에 부착하였다. 3월 17일 밤에는 홍해성이 김진효(金鎭孝)·김용구(金龍久)·손기현·손한조(孫漢祚) 등과 함께 문명 학교에 모여 만세 운동을 촉구하는 등 만세 운동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3월 18일 격문을 부착한 사실로 인해 홍해성을 비롯한 김상구·김종태·김진효·손한조·김종식(金鍾軾)·강재식(姜在植)·홍용팔(洪龍八)·김대선(金大善) 등은 운문 주재소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홍해성은 돌아오는 길에 동료들과 즉석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면사무소로 가서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을 제작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쳤다. 3월 20일 대구 헌병 분대에서 헌병 3명과 청도 경찰서에서 서장 이하 5명의 경찰이 출동해서 만세 시위를 벌인 주동자 검거 작업에 나섰다. 홍해성은 이때 체포되어 1919년 5월 2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며, 1919년 9월 25일 고등 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