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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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乳白色-靑松白磁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소희 |
[개설]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청송백자는 해주백자, 회령자기, 양구백자와 함께 조선시대 4대 지방요(地方窯) 중 하나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문경사기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며 활발히 생산되었다. 일본으로까지 유명세를 떨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던 청송백자, 그 500년의 역사 속을 들여다보았다.
[500년 역사를 간직한 청송백자]
청송 지역의 가마터 지표조사 결과 16세기부터 백자의 제작이 이루어진 것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1454년(단종 2)에 완성된『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청송군조에 “백토(白土)가 청부현(靑鳧縣)의 북쪽 방광산동(放光山洞)에서 난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16세기 이전부터 백자가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19세기 초반 서유구(徐有榘)가 저술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청송의 특산물로 백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편찬한 『조선산업지(朝鮮産業誌)』에는 청송군 3개 마을에 가마 수는 4개이며 1년간 생산액이 500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500여 년이라는 역사를 간직한 청송의 백자는 현재 총 48기의 가마터가 법수광산을 중심으로 반경 10㎞ 이내에 분포하고 있다. 백자가마터의 운영 시기는 16세기~20세기로 확인되며, 17세기와 20세기에 운영된 가마터가 많은 편이다.
청송백자는 시기별로 그 형태가 조금씩 변화해 갔다. 먼저 16세기 후반 전국에서 백자가 널리 제작되기 시작하던 시기 청송에서도 백자가 제작되었으며, 17세기에는 부남면과 주왕산면을 중심으로 굽바닥이 오목하게 생긴 오목굽 위주의 회색청자가 제작되었다. 18세기는 유백색의 백자가 제작된 시기로 오목굽에서 낮은 굽다리로 변경되었다. 19세기에는 18세기의 전통을 이어 유백색과 아백색의 백자가 제작되었으며, 도석(陶石)을 원료로 제작한 청송백자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20세기로 들어오면서 기벽이 얇고 가벼우며 유백색을 띠고 있는 청송백자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된다.
청송백자는 질 좋은 도석을 바탕으로 1920~1930년대 일본으로 판매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특히 도쿄의 미츠코시[三越]상점[현재의 미츠코시백화점]으로도 수출될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다 1958년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청송백자 복원 준비 및 2009년 9월 1일 고만경[1930~2018]을 청송군 향토문화유산[무형유산] 제1호로 지정하여 전통적인 제작 방식으로 청송백자를 복원함으로써 다시 그 빛을 보고 있다.
[청송백자 나오는 날 ‘점날’]
예로부터 사기굴에서 백자가 나오는 날을 ‘점날’이라고 하였다. 굴에서 그릇을 꺼내면 상품의 질에 따라 원기, 중태, 파기로 분류하였다. 원기는 판매상품으로 손상이 없는 것, 중태는 그릇이 불에 녹아 찌그러지거나 소성이 불완전한 것이다. 중태는 판매상품으로는 부적합하더라도 사용에는 지장이 없으므로 헐값에 지역 주민에게 팔기도 하였다. 이마저도 안되는 그릇은 파기라 하여 깨뜨려 내버렸다.
원기로 분류된 그릇은 종류와 크기 등에 따라 마당에 정렬한 후 장사꾼이 오기를 기다렸다. 점날이 되면 각지에서 온 등짐장수와 지역 장사꾼들이 몰려드는데, 등짐장수들은 점날 이전에 미리 와서 주막에 머무르며 그릇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점날 당일이 되면, 북적이는 손님들로 인해 공방은 축제 분위기였다.
청송백자는 ‘점주→중간상인→지역민·일반인’에게 유통되었다. 당시 백자의 가격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50년대 남자의 하루 품삯이면 사발대접 3~5벌은 살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송백자의 유통권역은 청송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동해안과 남부 지역, 서부 내륙지역, 청송군내로 나눌 수 있다. 특히 경상북도 동해안 일대에 많이 판매되었는데 거리상 가깝다는 이점과 꾸준한 수요층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등짐장수들이 해산물, 소금 등으로 교환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도 작용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와 함께 문경백자 역시 상당히 번창하였기 때문에 문경백자와의 경쟁을 피해서 청송백자의 유통권역이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청송백자 제작 과정]
청송백자는 1단계 원료준비단계, 2단계 성형단계, 3단계 소성단계[번조→사발따기]로 나누어진다. 1단계와 2단계는 사기움에서 이루어지는데, 사기움이란 청송백자 제작을 위해 원료 준비부터 성형, 건조, 보관에 이르는 모든 공정이 이루어지는 공방이다. 그리고 3단계는 사기굴에서 굽는 단계로, 사기굴이란 번조단계가 이루어지는 가마가 굴과 같다 하여 청송지역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1단계인 원료준비단계는 ‘도석 채취 및 분쇄→수비[질거르기]작업→질건조→질밟기→꼬박밀기’로 이루어진다. 먼저 도석을 채취한 뒤 크고 무거운 대형 디딜방아를 이용해 도석을 빻아준다. 그리고 원료의 입자를 고르게 하는 수비[질거르기]작업을 한다. 이 과정은 분쇄된 원료를 물에 넣어 희석시키고 윗물을 받아 가라앉는 미세한 흙분을 받는 작업이다. 수비작업이 완료된 도석은 성형할 때까지 완전히 건조한 상태로 보관함으로써 성분의 변질을 막는다. 수비작업 후 가라앉는 앙금을 ‘질’이라고 하며, 질의 색깔은 밀가루와 비슷한 순백색을 띤다.
건조된 질은 점도를 높이고 내부 공기를 빼기 위해 질밟기 과정을 거친다. 이후 사기대장이 사발짓기가 용이하도록 모양을 만들어주는 꼬박밀기 과정을 거친다. 꼬박밀기는, 질밟기가 끝나면 완료된 질에 물을 묻혀가면서 성형하기 적당한 수분이 유지되도록 하는데, 꼬박돌 위에서 몇 번 두드린 후 손으로 굴리고 비벼 가소성과 점력을 높이는 과정을 말한다.
2단계인 성형단계는 ‘사발짓기→굽깎기→그림넣기→유약처리→건조와 보관’으로 이루어진다. 사발짓기는 그릇의 모양을 만드는 과정으로 전통방법인 발물레를 사용하여 만든다. 사발짓기가 끝나고 적당히 건조된 그릇을 물레 위에 얹어놓고 굽을 깎으며, 건조된 그릇의 표면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예술미를 더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표면에 유약을 입혀 그릇의 강도와 광택을 내는 작업을 한다. 청송 지역 ‘회돌’과 ‘보래’를 빻아 수비를 한 후 각각 2:8의 비율로 섞어 사용한다. 이렇게 유약처리 과정까지 끝낸 그릇은 초벌구이로 소성을 완료하기 위해 완전 건조를 한다. 사기움 내 봉내방에서 열을 가하는 음건법을 이용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도석의 특수성 덕분에 그릇이 변형되거나 파손되지 않는다.
3단계인 소성단계[번조→사발따기]는 ‘사발쌓기→소성→사발따기’로 이루어진다. 먼저 사발쌓기는 소성을 위해 사기굴에 그릇을 넣는 작업이다. 이때 도석 원료를 물에 개어서 사기굴 내부를 칠하면, 내화력이 강한 도석원료로 인해 사기굴 내부에 이물질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여 깨끗한 그릇을 생산할 수 있다. 사기굴에 그릇을 다 재었으면 도자기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굴에 불을 때어 굽는 과정을 거친다.
청송백자의 번조작업은 아궁이(달음칸)에 연료를 가득 세워 불을 지핀 후 연료를 더 넣지 않고 세운 연료가 다 타면 ‘창불’로써 조절한다. 이로써 재벌구이를 생략하는 것이 특징이다. 소성이 완료되면 사발따기라 하여 사기굴에서 그릇을 꺼낸다. 불때기가 끝나고 하루 정도 지나 그릇을 손으로 만지면 따뜻한 온기가 있을 때가 사발따기의 가장 적당한 시기라고 한다.
[청송백자의 특징]
16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약 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청송백자는 강원도 양구백자, 황해도 해주백자, 함경도 회령자기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요(地方窯)이다. 청송백자는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흙을 사용하는 타 지역의 백자와 달리 ‘도석’이라는 돌을 빻아서 빚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독특한 제작방식으로 청송백자는 눈처럼 하얀 설백색을 띠며 1,250~1,300℃의 고온소성으로 두께가 얇고 가벼우면서도 강도가 높다.
장인의 혼을 담아 빚어낸 청송백자는 절제된 선과 담백하고 고풍스러운 색으로 가장 한국적인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예로부터 밥맛 좋고 물맛 좋은 그릇으로 이름난 청송백자는 전통도자기로서의 가치를 뛰어넘어 현대인들 식탁에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는 생활도자기로 거듭나고 있다.
[청송백자 장인 고만경]
고만경[1930~2018]은 전통 방법으로 청송백자를 복원하기 위해 열성을 다하였다. 고만경은 청송 부남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44년 고만경이 15살이 되던 해, 부남면 화장리 웃화장공방 사기공방에 들어가면서 백자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후 1947년 한소밭골 공방을 시작으로 설티, 웃화장, 질티, 법수 등에서 사기대장으로 일하였다. 그리고 1958년을 마지막으로 가마문을 닫을 때까지 15년 동안 일상생활에 필요한 사발, 대접, 접시 등 막사발을 만들면서 백자 연구를 거듭해왔다.
백자만들기를 배운 지 3년 후 대장 노릇도 했으나 중간에 점주의 재정 악화로 폐점을 하면서 다른 공방에서 잠시 일하다 맏형과 같이 직접 공방을 운영해왔다. 하지만 급격한 현대화의 진행 속에서 공업용 제품의 대량생산화가 이루어지자 청송백자는 경쟁력을 잃고, 1958년 공방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고만경은 대구, 포항 등지를 돌며 행상, 농막일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2009년 9월 1일 청송백자의 복원 전승을 위해 청송군에서는 고만경을 청송군 향토문화유산[무형유산] 제1호로 지정하였다. 오랜 경험과 백자 연구를 통해 터득한 자신만의 비법을 통해 가장 능률적이고 효과적인 기능을 연마하여 사기대장으로 자리매김한 고만경은 단기간에 옛 청송백자의 원형을 재현하였으며 그 전통을 전승 보존하기위해 사기대장으로서 열성을 다하고 전수자들에게 아낌없는 가르침을 전하였다. 2018년 5월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청송백자전수관과 청송백자전시관]
현재 청송군에는 500년간 이어온 청송백자의 제작 과정과 기술을 복원하기 위해 옛모습을 재현하여 건립한 청송백자전수관 및 대중들에게 청송백자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 건립한 청송백자전시관이 있다. 청송백자전수관은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법수길 190에 있으며 사기움[공방], 사기굴[전통가마]과 주막, 청송백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마터 뒤쪽으로는 청송백자의 원료인 도석을 채취한 광산이 하얀색 절벽을 보이며 드러나 있다.
움집형의 원형구조로 이루어진 사기움[공방]은 원료분쇄부터 유약작업까지 모든 공정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사기굴[전통가마] 역시 도석에 의해 특화된 형태이다. 그리고 사기굴에서 구워진 그릇을 상인들이 서로 가져가기 위해 며칠씩 묵으며 기다리던 주막까지 복원함으로써, 청송백자전수관은 역사 속 청송백자의 세월을 그대로 담고 있다.
청송군은 2003년~2009년 동안 청송백자 복원을 준비하면서 2004년 도석을 이용한 청송사기 제작기술의 특화현상을 연구하고, 2005년 청송백자 가마터 지표조사를 통해 청송백자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연구하여 그 가치를 확인한 뒤 2009년 7월 1일 청송백자전수관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그해 9월 1일 청송군 향토문화유산[무형유산] 제1호로 청송백자를 지정하고 고만경을 청송백자 기능보유자로 지정하였다.
청송군에서는 2011년 3월 서울 리빙디자인페어 청송백자특별관 운영을 비롯하여 2012년 일본 교토 가와구치미술관에서 청송백자 특별전을 개최했으며, 2013년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 전시, 2014년 제1회 청송백자 포럼 개최, 2016년 청송백자 가와구치미술관 초청 한일교류전 등 청송백자를 알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또한 일일체험으로 물레체험, 흙으로 만들기 체험, 나만의 핸드페인팅, 찾아가는 도예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정기체험으로는 지역민도예강좌, 청소년도예동아리 등을 운영하여 청송백자 홍보와 대중화에도 힘쓰고 있다.
청송백자전시관은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주왕산로 494[하의리 842] 청송도예촌 내에 있다. 청송도예촌은 청송백자전시관을 비롯하여 청송심수관도예전시관, 청송백자공방동, 공방[사기움], 가마[사기굴] 등으로 구성되어 2014년에 준공하였다. 청송백자전시관 내에는 절제되고 고풍스러운 고만경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백자의 제작 과정과 조선시대부터 근현대 백자의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소노벨 청송(리조트)가 인근에 들어서 있어 타지에서 온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