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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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泰烋 |
영어공식명칭 | Shin Taehyu |
이칭/별칭 | 신태걸(申泰杰)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70년 8월 3일 - 신태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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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6일 - 신태휴 화목장터 3.1독립만세운동 주동 |
몰년 시기/일시 | 1931년 - 신태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신태휴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신태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26일~27일 - 화목장터 3.1독립만세운동 |
출생지 | 경상도 청송도호부 무계동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무계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무계리 |
활동지 | 화목장터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구산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신태휴(申泰烋)[1870~1931]는 1919년 3월 26일 조현욱(趙炫郁)과 함께 청송군 현서면에서 일어난 화목장터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가계]
본관은 평산(平山). 이명은 신태걸(申泰杰). 1870년 8월 3일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무계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신태휴는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우리 민족도 한 목소리로 힘을 모으면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던 중, 현서면 수락동(水洛洞)의 조현욱으로부터 궐기를 촉구하는 연락을 받고 떨쳐 일어났다. 신태휴는 1919년 3월 26일 아침 조현욱, 조병국(趙柄國) 등과 함께 마을 사람 50여 명을 이끌고 화목장터로 향하였다. 그날은 군청에서 현서면 내의 각 구장들과 유지들이 모여 각지에서 일어나는 만세 시위에 대한 대책 회의를 하고 있었다.
조현욱이 당당하게 달려가 이들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설득하였고, 신태휴는 그들을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시킬 생각으로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주위를 행진하였다. 현서면의 구장과 유지들의 호응까지 얻어낸 시위 행렬은 장터 부근을 2~3회나 돌며 행진하였다. 시위 행렬이 지날 때마다 환호하고 참여하는 인파가 계속 늘어나 오후 1시경에는 시위대가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신태휴는 조현욱과 함께 시위 행렬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평화적으로 질서 있게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에 당황한 현서 주재소(駐在所) 순사들이 면장과 함께 달려나와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 행렬을 가로막고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신태휴는 조현욱과 함께 체포되었다. 신태휴는 그해 5월 5일 대구복심법원을 거쳐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