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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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達伐 戰鬪 |
영어공식명칭 | Struggle of Dalbeo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이영호 |
[정의]
839년 1월 19일 지금의 대구 지역인 달벌에서 신라의 왕족 김우징이 민애왕 군대와 싸워 승리한 전투.
[개설]
836년 12월에 흥덕왕이 죽자 격심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상대등 김균정(金均貞)이 피살되고 김제륭(金悌隆)이 승리하여 희강왕이 되었다. 희강왕은 다시 상대등 김명(金明)의 핍박을 받아 자살하고, 김명이 민애왕(閔哀王)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다시 궁복(弓福)[장보고]의 지원을 얻은 김우징(金祐徵)이 달벌(達伐)[지금의 대구 지역]에서 민애왕 군을 타도하고 즉위하여 신무왕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
흥덕왕이 죽은 뒤 상대등 김균정은 아들 김우징, 매서(妹壻) 김예징(金禮徵), 김양(金陽) 등의 후원을 받았으나, 시중이었던 김명은 아찬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 등과 함께 김균정의 조카이자 김명 자신의 매부인 김제륭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결국 상대등 김균정이 피살되고 김제륭이 승리하여 희강왕이 되었다. 희강왕 대에는 김명이 상대등에, 아찬 이홍이 시중에 취임하였으나 실권은 김명이 장악하였다. 얼마 안 있어 희강왕은 김명과 이홍의 핍박을 받아 자살하고, 22세의 김명이 즉위하여 민애왕이 되었다. 흥덕왕이 죽기 전 태자 책봉이나 후계자에 대한 유언이 없어 격심한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다.
[경과]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김우징과 김양은 희강왕이 왕위에 오르자 청해진으로 피신하여 대사(大使) 궁복에게 의탁하였다. 838년 정월 희강왕이 죽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아찬 김우징은 궁복에게 군사 5,000명을 얻었다. 838년 12월 김양은 평동장군(平東將軍)이 되어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에서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가 이끄는 민애왕의 군대를 기병 3,000명으로 격파하였다. 839년 1월 19일, 김양의 군대는 밤낮없이 행군하여 달벌의 언덕에 이르렀다. 달벌은 오늘날의 대구인 달구벌(達句伐)을 가리키지만, 정확한 지점은 알 수 없다.
[결과]
민애왕은 이찬 대흔(大昕)과 대아찬 윤린(允璘)·억훈(嶷勛) 등에게 10만의 군대로 김양의 군대를 막게 하였다. 그러나 화전 끝에 패배한 민애왕의 군에서 죽은 사람이 절반을 넘었고 다수가 생포되었다. 이때 민애왕은 피신하다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하였다. 이에 김우징이 즉위하여 신무왕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달벌 전투는 흥덕왕 사후 벌어진 왕위 쟁탈전의 절정이었다. 이후 이처럼 격렬한 왕위 쟁탈전은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