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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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ic Ag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선사/석기,선사/청동기,선사/철기,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남석 |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역사.
[개설]
충청남도 당진시는 한반도의 중서부, 충남의 서북단에 위치하며 내포(內浦)의 중심 지역이다. 삽교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비옥한 예당 평야를 바탕으로 질 좋은 쌀이 생산되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리아스식 해안은 주민들에게 풍부한 수산물을 제공하였다. 이 때문에 당진 지역 사람들은 선사 시대부터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자급자족의 넉넉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인물을 배출했던 당진 지역은 심훈의 상록수 정신이 배어 있는 곳이며, 한말 의병에서 일제 강점기의 독립 만세 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족 운동의 거점지였다. 또한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한국의 베들레헴’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농수산물 생산지였던 당진 지역은 현대에 들어서 세계 굴지의 각종 철강 회사의 유입으로 철강 산업 도시로 거듭나는 중이다. 또한 산업 인구의 급증으로 2012년 1월 1일 당진시로 승격되었고, ‘당찬 당진’을 모토로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신흥 공업 도시로 급성장하고 있다.
[선사 시대]
당진 지역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인해 선사 시대 문화가 활성화된 지역이다. 또한 충청남도의 내포 지역에 해당하여 드넓은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다. 수로가 잘 발달되어 농경과 어업에 매우 편리하다. 당진 지역의 지형 구조는 100m 내외의 낮은 구릉지 지역으로 배산임수의 촌락이 크게 활성화될 수 있었다. 이것은 청동기 시대 인류가 활발하게 정주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최근 당진 지역의 지표 조사와 발굴 사업으로 다량의 선사 시대 유물이 발견된 바 있었다. 유물 발굴이 축적되면 당진 지역 선사 시대 원형을 정확하게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1. 구석기 시대
최근 당진 지역에 산업 시설이 건설되면서 각종 지표 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선사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다수 출토되고 있다. 당진 지역의 구석기 시대 주요 유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당진시 석문면 초락도 ‘큰 한해’라는 마을의 조개더미 근처에서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은 차돌로 제작한 격지인데 7×5.2×2.1㎝ 크기의 뗀석기 1점이다. 또한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 ‘조방골’ 마을에서도 1996년 뗀석기가 발견되었다. 또한 석문 중학교 향토 유물실에는 석문면 삼봉리에서 발견된 여러 면 석기 1점이 소장되어 있다.
2. 신석기 시대
당진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물로는 조개더미·주거지·갈돌·갈판·가락바퀴 토기 등이 주목된다. 조개더미는 석문면 초락도리·삼봉리·교로리·대난지도·소난지도·고대면 당진포리 등에서 발견되었다. 조개더미[패총]는 사람들이 조개나 굴을 먹고 껍질을 버린 무더기를 말하는데, 당진의 조개더미는 굴 껍질을 주종으로 바지락·대합·소라 껍질로 구성되었다. 이곳에서는 빗살무늬 토기·민무늬 토기와 같은 토기류, 갈돌·돌화살촉·돌도끼·홈자귀와 같은 석기류, 그리고 가락바퀴와 동물의 뼈, 토제소상(土製塑像) 등이 수집되었다. 빗살무늬 토기는 석문면 초락도리 살막곶이와 대난지도에서도 발견되었다. 초락도리에서 발견된 토기는 바탕흙에 고운 모래가 많이 섞인 것으로, 몸통 부분의 두께는 0.9㎝쯤 되며 무늬가 평행 사선으로 깊고 굵게 그어졌다. 이들 유물은 해안가 낮은 지대의 남향 밭에서 발견되었는데, 인근 지역에서도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3. 청동기 시대
1990년 당진군 합덕읍 소소리에서 출토된 철부[도끼, 끌], 청동꺽창, 잔무늬 동거울[다뉴세문경], 세형동검, 유리 대롱옥 등이 주목되는 청동기 시대 유물이다. 2세기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들은 초기 철기 문화를 대표하는 것들이다. 이를 통해 부족 연합 국가 시대였던 당시에 당진 지역에도 강력한 부족 국가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토 전례가 드문 이들 유물은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청동기 유적으로는 당진-대전 간 고속 도로 건설 공사 구간 내 문화 유적 시굴 조사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된 당진군 면천면 자개리Ⅰ, Ⅱ 유적이 있다. 이 발굴 조사에서는 청동기 시대 취락과 통일 신라 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 3기가 확인되었다. 자개리Ⅰ 유적지의 조사 면적은 37,215㎡에 달했는데 각종 토기편류, 반달 돌칼[반월형 석도], 홈자귀[유구석부(有溝石斧)], 흙도, 돌칼, 돌화살촉, 탄화곡물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자개리 Ⅱ 유적지에서도 청동기 시대 주거지 22기, 원형 및 방형의 수혈 유구 4기, 돌덧널무덤 10기, 조선 시대 수혈 2기가 확인되었다.
4. 초기 철기 시대
철기 시대 유물로는 당진군 고대면 성산리에서 확인된 독무덤[옹관묘(甕棺墓)]이 있다. 그리고 돌살촉[석촉(石鏃)] 10점이 옹관 내에서 수습되었다. 또한 송악면 기지시리 내기 유적에서도 원삼국 시대 주거지 1기, 구상 유구(溝狀遺構) 1기가 확인되었다. 석문면에 조성되고 있는 석문 국가 산업 단지 부지에서도 원삼국 시대 수혈 유구가 1기 발견되었다.
[고대]
1. 삼국 시대
조선 시대 정리·제작된 각종 읍지류의 「건치 연혁」 편을 보면, 당진 지역에 있었던 백제 시대의 군과 현이 등장하고 있다. 우선 면천에는 혜군(槥郡)이 있었고, 당진에는 벌수지현(伐首只縣)[일명 부지현(夫只縣)]이 있었으며 현재의 정미면과 대호지면은 여촌현(餘村縣)에 속했다. 또한 신평은 사평현(沙平縣)에 속했다. 대부분 ‘현’인데, 면천 지역만 ‘군’으로 표기되었다. 면천의 관할 구역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매우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벌수지현의 치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당진의 향토 사학자 신양웅은 당진시 고대면 성산리 ‘버스랑이’ 마을로 추정했다. 그 근거로 버스랑이 마을이 당과 왕래가 빈번했던 당진포가 부근에 있고, 고증이 되지 못한 옛 성터, 즉 퇴미산성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원삼국 시대 각종 토기 조각과 주거지, 독무덤이 많이 출토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당진 지역에서 확인된 삼국 시대 유적을 보면, 당진읍 원당리 유적에서 백제 시대 주거지 및 수혈과 같은 생활 유구가 발견되었다. 2009년에는 당진읍 우두리 유적에서도 백제 시대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 4기가 발견되었다. 2009년 석문 국가 산업 단지 조성 부지에서도 백제 시대 주거지 4기, 수혈 유구 4기가 확인되었다. 또한 2010년 당진군 송산면 제2 일반 산업 단지 조성 부지에서도 백제 시대 주거지 6기가 발견되었다. 이와 같이 당진에서 출토되는 토기 중에는 백제 시대 것으로 보이는 것이 상당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중국 문화 관련 유물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당진에 정착했던 집단이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2006년에 출토된 당진읍 채운리 유적도 귀중한 백제 시대 유적이다. 이 유적은 삼성 웰스빌 아파트 신축 과정에서 발견된 것으로 백제 시대 널무덤[토광묘(土壙墓)] 17기, 시대 미상 수혈 1기, 용도 미상의 유구 1기 등 총 19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널무덤의 구조는 지하로 무덤구덩이[묘광(墓壙)]을 파고 그 안에 목관(木棺) 혹은 목곽(木槨)을 설치하였다. 유물로는 토기·철기·청동장식품·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1점을 제외하고 모두 목 짧은 항아리인 단경호(短頸壺)이며, 철기의 종류로는 칼[철도자(鐵刀子)]·낫[철겸(鐵鎌)]·도끼[철부(鐵斧)]·화살촉[철족(鐵鏃)] 등이다. 그 외에 청동 장식품 1점과 78점의 구슬이 출토되었다. 당진읍 채운리 백제 널무덤의 발굴은 당진군 일대에서 처음 조사된 백제 고분이며, 서해안 일대 백제사를 재정립할 수 있는 좋은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2. 통일 신라
757년(경덕왕 16)에 와서 벌수지현이라는 고을 명칭은 당진현(唐津縣)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의 당진 지역은 ‘당진 역사(唐津歷史)의 전성기’ 를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당진 지역 항구로는 당진포(唐津浦)와 대진(大津)[한진]을 들 수 있다. 당진포는 현재 당진시 고대면 당진포리에 있던 포구이며, 대진[한진]은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 포구다. 이곳은 당과 교역하는 문호로 개방되었고 당나라의 문화가 이곳을 통해 남행(南行)하였을 것이다.
당으로 가는 신라의 주민들은 수없이 당진포와 대진을 거쳐 당으로 들어갔으며, 또한 그들은 당나라 문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당진포와 대진항은 당나라로 드나드는 포구로 붐볐다. 한편 당진시 고대면 진관리에 관동(館洞) 마을이 있다. 진관리의 지명 유래도 당나라로 가는 나루길[津]이 있고, 공인(公人)을 도와주는 관(館)이 있어 ‘진관(眞館)’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적당한 해로의 발달은 당의 선진 문화 유입을 가져왔고 어업의 발달은 당진군내에 형성된 포구를 활성화시켰다. 이제 당진 지역은 당의 선진 문화가 상륙함에 따라 가장 흥성한 항구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고 대당 전진 기지의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의 부족으로 상세한 해명은 어려우나, 당진 지역에 산재한 많은 사지(寺址)와 당진포를 중심으로 축성된 산성은 당진의 흥성함을 입증하는 하나의 사례로 여겨진다.
[고려 시대]
1. 후삼국
혜성군(槥城郡)[현 당진시 면천면]이 격동의 회오리에 휘말린 것은 후삼국 시기였다. 8세기 후반 이후 신라의 진골 정권은 지방 세력을 거의 통제할 수 없는 무기력한 행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은 10세기에 이르도록 계속되었다. 급기야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탄 견훤과 궁예에 의하여 독자적 정권이 수립되었고,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당진 지역은 후고구려 궁예의 수중에 들어갔다. 궁예는 신라의 영토를 점진적으로 침탈하여 경기·황해의 대부분과 평안도·충청도 일부를 점령하였다. 충청도의 서북부에 위치한 당진 지역도 혜성군과 함께 궁예의 세력권 안에 흡수된 것이다. 혜성군 출신의 복지겸(卜智謙)[?~?]과 박술희(朴述熙)[?~945]도 처음에는 궁예를 섬기던 장수들이었다. 하지만 궁예는 왕건에 의하여 제거되었고, 복지겸과 박술희도 왕건을 추대한 공로로 고려의 개국 공신에 오르게 되었다.
한편 전주 지역에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북상함에 따라 후백제 및 고려는 합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벌였는데 결국 고려의 승리로 끝나면서 합덕 지역은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당진군사』에 따르면 합덕읍 성동리에 있는 테미산성은 견훤이 쌓은 것이라 전한다. 또한 견훤은 합덕읍 대전리에 있는 쌉싸리 방죽도 축조하여 왕건과의 전투 때에 군마의 음용수를 공급했다고 전한다. 결국 당진 지역은 후백제와 대립한 고려의 최전선이어서, 매우 중요하게 간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군은 혜성과 순성을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었고 이를 바탕으로 합덕으로 진격하였다. 합덕 전투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2. 고려 시대
고려 시대 성종이 전국을 12목으로 나누어 관리할 때 당진 지역은 홍주목 관할이었다. 통일 신라 때부터 사용했던 혜성군과 당진현, 신평현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고려는 1018년(현종 9)에 행정 구역을 5도 양계로 개편했고, 당진 지역은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정세의 변동과 인물의 등장에 따라 이 지역의 행정적 위치가 요동치기도 했다. 즉 1106년(예종 1)에는 혜성군과 당진현에 감무를 두었던 사실이 있고, 신평현은 1018년(현종 9) 이후 운주[홍주, 현 홍성]의 속현이 되었으며, 1293년(충렬왕 19)에는 혜성군의 복규(卜奎)가 합단군(哈丹軍)을 막은 공이 있어 혜성군이 면주(沔州)로 승격하였다.
고려 시대 전체적으로 볼 때, 당진 지역은 운주의 속군과 속현에 해당되었다. 즉 홍주는 혜성군[현 당진시]·대흥군·결성군의 3군과 고구현·보령현·여양현·청양현·신평현[현 당진시 신평면]·덕풍현·이산현·당진현·여미현[현 당진시 정미면]·여양현·정해현[현 당진시 정미면 일부]의 11개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던 것이다. 결국 중세 사회의 당진 지역은 작은 단위로 분할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대 사회부터 형성된 자연 마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채 전통적인 촌락 공동체 풍습과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 성종 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전국의 향·소·부곡은 모두 785개이며 충청남도에 속한 것으로는 46개이다. 이를 세분하면 향이 15개, 소가 40개, 부곡이 41개이다. 그 밖에 처(處)가 2개소나 있는데 당진 지역에는 향은 없고, 부곡은 5개, 소가 2개 있었다. 염솔부곡(廉率部曲), 염정부곡(塩貞部曲), 온월부곡(溫月部曲), 가리저부곡(加里渚部曲), 합덕부곡(合德部曲), 명해소(明海所), 도촌소(桃村所) 등이 그것이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홍주목 고적조에 의하면 합덕폐현(合德廢縣)은 “본래 덕풍현(德豊縣) 소속으로 부곡이 되었다. 고려 1298년(충렬왕 24)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황석량(黃石良)이 원의 조정에 들어가 총애를 받은 바 있어 현이 되었고 뒤에 본주에 소속되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고려 사회에서는 일반 군현민이 반란을 일으켰을 경우에는 집단적으로 처벌하여 군현을 부곡이나 향 소 등으로 강등했지만 반대로 이들이 국가적인 공을 세웠을 경우에는 군현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결국 고려 시대 당진 지역 내 여러 곳에 설치되었던 향·소·부곡은 고려 말부터 감소 추세를 보이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 모두 폐지되어 현으로 승격되었다.
고려 시대 대표적인 유적으로 당진시 정미면 수당리에 보물 제100호인 당진 안국사지 석조 여래 삼존 입상과 보물 제101호인 당진 안국사지 석탑이 있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의 군현은 1413년(태종 13)에 개편되었다. 이때 당진 지역에는 면천군(沔川郡)과 당진현(唐津縣)이 설치되었다. 이곳을 관할하는 도(道)도 양광도(楊廣道)에서 충청도(忠淸道)로 개칭되었다.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의 머리글자를 조합한 명칭이었다. 하지만 충주와 청주의 고을이 강등되면 공주와 홍주의 머리글자를 도명에 사용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충공도·청공도·청홍도라는 도명이 사용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충홍도·공홍도·공청도·홍청도·충공도·홍충도 등의 도명도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관직조 기사에는 수령의 입사 유형에 대한 기준을 정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홍주 목사(洪州牧使)는 정3품으로 문과 출신이 부임하며, 면천 군수(沔川郡守)는 종4품으로 음관(蔭官)이 부임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한 당진 현감(唐津縣監)은 종6품직으로 문과 출신이나 음관 출신이 모두 부임할 수 있었다. 면천 군수가 당진 현감보다 높은 품계에 있는 것은 면천군의 규모가 당진현보다 현저히 컸기 때문이다.
당진 지역의 면리 조직을 보면 당진현은 현내면·동면·남면·상서면·하서면·고산면·외맹면·내맹면 등 8개 면을 관할했고, 면천군은 읍내면·죽림면·덕두면·가화면·범천면·손동면·초천면·중흥면·감천면·송산면·승선면·정계면·송암면·마산면 등의 14개 면을 관할했다. 현재의 읍면과 비교해 보면, 당진현은 현재의 당진읍과 고대면·석문면을 관할했으며, 면천군은 현재의 면천면 지역과 순성면·우강면·송악면·송산면을 관할했다. 한편 고려 시대 이래로 합덕과 신평 지역, 그리고 우강면의 일부 지역은 월경지(越境地)로 다른 군·현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충청도의 군사 조직을 보면 충청도 관찰사가 병사와 수사를 겸하였고 전임의 병사와 수사가 각 1인 있었다. 전임의 병사가 관리하는 병영은 1402년(태종 2)에는 덕산에 두었다가 1418년(태종 18)에 해미로 옮겼다. 또 충청 수영은 1466년(세조 12) 보령에 두었다. 육군은 각 고을의 지방관이 관할했고, 수군의 경우에는 소근포진관(所斤浦鎭管)[태안], 마량진관(馬梁鎭管)[강진]에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배치되었고, 당진포(唐津浦)[당진]와 파지도(波知島)[서산], 서천포(舒川浦)[서천]에 만호(萬戶)가 있었다. 당진포의 수군만호는 원래 박지포(朴只浦)[현 석문면 웅포]에 있었으나 진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당진시 고대면 당진포리로 이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진포 만호에 배치된 병선은 13척이고 선군수(船軍數)는 790명이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군사 조직과 아울러 교통과 통신 체제도 정비되었다. 군사적인 위급 사태를 알리기 위하여 봉수제(烽燧制)가 정비되었고, 물자 수송과 통신을 위한 역참이 설치되어 국방과 중앙 집권적 행정 운영이 한층 용이해졌다. 충청도의 봉수제는 충주목의 봉수대 4곳을 비롯하여 총 41개소의 봉수가 있었고 그중 당진현에 1개소, 면천군에 1개소, 해미현에 1개소가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당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당진현의 고산봉수(高山烽燧)는 고대면 당진포리 고산에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창택산(倉宅山) 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해미현 안국산(安國山) 봉수에 응했다. 해미현의 봉수는 정미면 수당리 안국산에 있었는데 서쪽으로는 서산군 북산(北山)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당진현 고산 봉수에 응했다. 또한 면천군 창택산 봉수는 송산면 삼월리 창택산에 있었는데 서쪽으로는 당진현의 고산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경기도 양성현의 괴태길곶(槐台吉串) 봉수에 응했다. 정미면 수당리 안국산 봉수와 송산면 삼월리 창택산[봉화산] 봉수는 일제 강점기 만세 시위가 발생했던 곳으로 민족 운동 차원에서도 중요한 유적지이다.
역참제로는 면천군 소속의 순성역(順城驛)과 당진현 소속의 흥세역(興世驛)이 있었다. 순성역은 현재 순성면 양유리 역말에 있었는데 일명 구화역(仇火驛)이라고도 하는데 『면양읍지』에 보면 순성역에는 말 14필, 역리 20명, 노(奴) 15명, 비(婢) 1명이 있었으며 금정역에 속해 있었다. 흥세역은 당진읍 용연리 역말에 있었다. 이곳은 현재 용연 초등학교가 있는 자리다. 이곳 지명이 ‘역말’이고, 앞을 흐르는 하천의 명칭이 ‘역천’인 것은 흥세역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곳에는 역리 17명, 노 2명, 비 2명, 기마 4필이 있었고 짐을 싣는 말인 복마(卜馬)가 4필 있었다. 순성역과 흥세역은 모두 소역(小驛)이다.
[근대]
충청남도 당진 지역은 충남의 서북단에 위치하고 있어서 개항과 근대화라는 시대적 조류에 비교적 느리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로보다 발달된 해로를 통해 경향 각지의 움직임은 인지할 수 있었다. 특히 1880년대 일본 상인의 미곡 수탈은 당진 지역의 우평·강문 평야에서도 진행되었고, 이곳들은 ‘방곡령(防穀令)’ 대상지에 해당되었다. 이러한 일본 상인의 침투에 대한 항쟁 의식은 1880년대 동학의 급속한 유입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1894년 7월 청일 전쟁의 발발은 당진 지역 주민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각인되었다. 당진 해안에 인접한 풍도 앞바다에서 촉발된 청일 전쟁은 근대 무기의 위력을 실감케 하였다. 일찍이 1868년(고종 5) 오페르트 도굴 사건 당시에 등장하였던 ‘이양선(異樣船)’에 놀란 당진 지역 주민들은 다시 한번 근대 무기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와 같은 의식의 변화는 당진 지역 근대 교육에 반영되었고, 동학과 천주교, 개신교의 유입에 앞장서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일제 침략과 함께 진행된 지방 행정 구역 개편은 1895년 5월부터 시작되었다. 핵심 내용은 전국을 23부로 나누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충청도 소속이었던 당진 지역은 홍주부 관찰사의 관할로 바뀌게 되었다. 당시 당진 지역은 당진군과 면천군이었는데, 주변의 20여 개의 군과 더불어 홍주부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개편 작업은 1895년 명성 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백성들의 거센 항의를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친러 정권이 들어선 1896년 13도제로 전환되었다. 이때 좌도와 우도로 나뉘던 전통적 지방 제도가 남도와 북도로 바뀌게 되었다. 이로써 당진 지역은 공주에 도청이 있는 충청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 제국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본격적으로 뻗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제는 1906년 9월 전면적인 지방 행정 제도의 개편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던 월경지를 간단명료한 지방 구획으로 정리해 버렸다. 이때 삽교천 양안에 즐비하던 월경지들이 인근 군에 귀속되었다. 삽교천 서쪽에 있던 월경지들은 모두 면천군에 흡수 통합되었다.
우선 홍주목 소속이던 신남면(新南面)·신북면(新北面)·합남면(合南面)·합북면(合北面)·현내면(縣內面) 등 5개면이 면천군에 흡수되었다. 또한 덕산군 소속인 비방면(菲芳面), 아산군 소속의 이서면(二西面), 천안군 소속의 우평(牛坪) 마을도 면천군에 흡수되었다. 이로써 면천군은 22개면 308개 동리를 관할하는 거대 군이 되었다. 한편 당진군은 8개면 130개 동리를 관할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조선 총독부에 의해 대대적인 지방 행정 구역 통폐합이 또 다시 이루어졌고, 면천군은 당진군에 흡수되었으며 면으로 격하되었다. 일제의 행정 구역 통폐합은 기존의 공동체 마을 해체하고, 오직 ‘행정의 효율성’만 강조하였다.
개항 이후 근대화 물결의 도래와 함께 당진 지역에도 신학(新學)이 수용되었다. 3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크고 작은 포구가 형성되었고 이곳을 통하여 신문물이 전래되었다. 근대 교육의 수용은 여러 형태의 학교를 곳곳에 설립케 하였다. 학교는 정부의 시책에 의한 허가 형태로 설립되기도 하고, 근대화에 개명한 애국 계몽 운동가들에 의하여 사숙(私塾)의 형태로 세워지기도 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에 의하여 종교의 전도를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특히 지식인들은 을사늑약을 당하면서 그 치욕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립 학교들이 많이 늘어났다. 대표적인 학교로 매괴 학교(玫瑰學校), 당성 학교(唐城學校), 통명 학교(通明學校), 면양 학교(沔陽學校), 남산 가숙(南山家塾), 미산 학교(嵋山學校) 등이 있다.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에 시행된 전국의 부·군·면(府郡面) 통폐합이 될 때 충청남도 당진 지역은 1914년 4월 당진군과 면천군을 통폐합하여 당진군이 되었다. 구한말 당진군은 8개면 130개 동리를, 면천군은 22개면 308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통합된 당진군은 10개면, 123개 동리를 관할했으며 군청 소재지는 이배면 읍내리로 정했다. 10개면은 이배면(螭背面)·고대면(高大面)·석문면(石門面)·마암면(馬岩面)·송산면(松山面)·순성면(順城面)·범천면(泛川面)·합덕면(合德面)·송악면(松嶽面)·신평면(新平面) 등이다. 이 가운데 마암면이 1917년 10월 면천면(沔川面)으로 바뀌었고, 이배면은 1928년 당진면으로, 범천면이 1942년 10월 우강면(牛江面)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일제 강점기 당진 지역 최대의 민족 운동은 1919년 독립 만세 운동이다. 당진 읍내에서의 만세 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지만 3월 10일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운동으로 당진 지역에서 최초의 만세 운동이자 충남 지방 최초의 학생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면천 공립 보통학교 4학년 원용은(元容殷)과 그의 형 원용하(元容夏)는 서울의 고종 인산에 참례한 후 귀향하여 학생들을 설득하고 동원해 3월 10일 태극기를 앞세우고 면천 시내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주동자로 지목된 원용은과 박창신은 공주 지청에서 검사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결국 퇴학 처리되었다.
당진 3·1 운동은 봉화 시위로 발전되었다. 당진 지역 3·1 운동은 대호지 주민들이 주도하였고 4월 4일, 정미면 천의리 천의 장터에서 발발한 독립 만세 운동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대호지·천의 장터 4·4 독립 만세 운동은 고종의 인산에 참례한 대호지면 유생 남주원(南柱元)·남상돈(南相敦)·남상락(南相洛)·남계창(南啓昌) 등이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입수하여 귀향한 후, 대호지면 이인정(李寅正) 면장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들은 ‘도로와 가로수 정비’라는 명목으로 대호지면 9개 마을 주민을 동원하여, 4월 4일에 5일장이 열리던 정미면 천의리로 행진하였다.
천의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던 주민들은 이들을 제지하는 천의 주재소 순사들을 물리쳤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펼쳤다. 이 결과 수백 명의 주민들이 피체되었고, 총 199명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현재 이와 관련하여 120명에 달하는 독립 유공자가 서훈되었다. 만세 운동 이후 4월 8일에는 대호지면 송전리와 정미면 수당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발발하기도 하였다.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지만, 4월 13일 송악면 기지시리에서도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려던 계획이 발각되어 8명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당진 지역 주민들은 일제 탄압에 맞서 치열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현대]
1957년 11월 6일 법률 제456호로 서산군 대호지면(大湖芝面)과 정미면(貞美面)이 당진군에 편입되어 당진군은 10개면에서 12개면으로 확장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7호로 당진면이 당진읍으로 승격되었고, 1973년 3월 12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정미면 여미리(餘美里)가 서산군 운산면으로 분리되어 나갔다. 그리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호로 합덕면이 합덕읍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2010년 1월 1일, 송악면이 송악읍으로 승격되었으며, 2011년 6월 29일 ‘충청남도 당진시 도농 복합 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안’이 제301회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당진은 ‘시’로 승격되었다. 이에 따라 2012년 1월 1일 당진시로 새롭게 출범하게 되었다. 2016년 현재 당진시는 2개 읍 9개 면 3개 행정동[11개 법정동] 221개 행정리[138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맡은 당진군청과 면사무소 공무원들은 수시로 담당 마을을 찾아 농민을 설득하여 공동체 활동에 참여시켰다. 주민들은 농촌 환경 정화 활동을 전개하여 농가를 개량하였고 농로를 확장하여 농기계가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소득 증대를 위해 공동의 작업장을 마련하였고 겨울철의 무료함을 소득을 위한 노동 활동으로 바꿨다. ‘개펄’이 광대했던 당진 지역 주민들은 제방을 쌓고 간척지를 조성하였으며, 굴 양식을 활성화하여 주민의 소득 증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다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의 준공으로 대부분 천수답이었던 농지는 전천후 농지로 변화하였으며, 우평·강문 평야에 해수 범람도 사라졌다. 서울로 향하는 교통은 당진 읍내에서 예산군 신례원을 거쳐 온양에서 천안으로 돌아가던 길이 삽교천 방조제 위로 옮겨지면서 서울 길이 세 시간에서 두 시간 대로 줄어들었으며, 2001년 12월 서해안 고속 도로가 완공되는 등 크게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