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4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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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鄕所部曲 |
영어공식명칭 | Hyangsobug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전기 |
집필자 | 김남석 |
[정의]
삼국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 존재하였던 특수한 행정 구역.
[개설]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는 여러 곳에 향·소·부곡을 설치 운영하였다. 향·소·부곡민은 양민이면서도 군현의 주민과 구별되는 특수 행정 구역으로서 차별을 받았다. 이들은 일반 군현의 주민보다 많은 세금을 부담했고, 거주 이전도 소속 집단 내로 제한되는 등 타지로의 이주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향이나 부곡에 거주하는 주민은 농업을, 소에 거주하는 주민은 수공업이나 광업품의 생산을 주된 생업으로 했다.
[당진의 향·소·부곡]
조선시대 중종 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홍주목의 경우, 향(鄕)이 4개소, 소(所)가 6개소, 부곡(部曲)이 4개소이다. 현재 당진 지역에 위치한 것을 정리하면 향은 없고, 부곡은 5개소, 소가 2개소로 나타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염솔 부곡(廉率部曲, 鹽率部曲)은 『신증동국여지승람』 해미현에 의하면 “재현북 삼십육리(在縣北三十六里)”라 하였다. 현재 당진시 정미면 하성리에 있었는데 소금 생산에 종사하였다.
2) 염정 부곡(塩貞部曲)은 『신증동국여지승람』 해미현에 의하면 “재현북 삼십이리(在縣北三十二里)”라 하였다. 현재 당진시 정미면 덕삼리에 있었다. 염솔 부곡 주민과 같이 소금 생산에 종사하였다.
3) 온월 부곡(溫月部曲)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면천군에 의하면 “재군동 이십삼리(在郡東二十三里)”라 기록하였다. 면천면 성상리를 기점으로 동쪽으로 23리 지점인데, 아직 소재지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4) 가리저 부곡(加里渚部曲)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면천군에 의하면 “재군동 이십오리(在郡東二十五里)”라 하였다. 면천면 성상리에서 동쪽으로 25리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고증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당진시 송악읍 도원리 가락(可樂) 마을이라 추정하고 있다.
5) 합덕 부곡(合德部曲)은 『신증동국여지승람』 홍주목에 의하면 “재주북 삼십리(在州北三十里)”라 하였다.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부근으로 추정된다.
6) 명해소(明海所)는 『신증동국여지승람』 홍주목에 의하면 “재신평현북 일백십사리(在新平縣北一百十四里)”라 하였다. 신평현에 있는데 홍주목에서 북쪽으로 114리에 있다는 것이다. 현재 당진시 송악면 고대리 인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7) 도촌소(桃村所)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면천군에 의하면 “재군북 이십리(在郡北二十里)”라 하였다. 면천면 성상리의 북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아직 소재지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상과 같이 현재 당진 지역에 설치되었던 향·소·부곡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홍주목·면천군·해미현의 고적(古跡)에 간단히 그 위치만 밝혔고, 그곳의 성격이 무엇인지 기록하지 않아서 해당 지역 주민의 활동 내용은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면천군 성씨에 ‘한씨(韓氏)’가 ‘부곡성(部曲姓)’이라 한 것을 보면 한씨들이 부곡에 많이 거주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해미현 성씨에 “염솔 부곡에는 박씨(朴氏), 명씨(明氏), 여씨(余氏,), 염정 부곡에는 박씨가 있다.”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여러 성씨들이 집단적으로 부곡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진 향·소·부곡의 변천]
향·소·부곡은 고려 후기에 들어서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그 지역 출신이 전공(戰功)을 세웠을 경우에 군현으로 승격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홍주목 고적에 보면 합덕현(合德縣)은 “본래 덕풍현의 부곡이었으나, 고려 1298년(충렬왕 24)에 이 고을 출신인 환자(宦者) 황석량(黃石良)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은총을 받은 바 있어 현(縣)으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본주에 와서 붙었다.”라고 하였다. 부곡민 출신으로 공을 세운 바가 있어서 일반 군현으로 승격된 것이다. 이와 같이 향·소·부곡은 조선 시대 초기까지 존속하다가 대대적인 지방 행정 개편과 함께 소멸되었다. 당진 지역에도 7곳의 부곡과 소가 있었으나 현재 어떠한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