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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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邑內洞 |
영어공식명칭 | Eupnae-dong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읍내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별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속하는 법정동.
[개설]
읍내동(邑內洞)은 당진시의 중심 업무 지구[CBD:Central Business District]로 옛 당진군 당진읍 읍내리 지역이다. 대부분의 관광지가 밀집되어 있고 국도 32호선, 지방도 615호선 등이 통과하여 교통의 요지를 이루고 있다. 당진현청과 당진읍성(唐津邑城)이 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명칭 유래]
읍내동은 본래 당진군 당진읍의 중심 지역으로 읍내리라 하였다. 2012년 당진군이 당진시로 승격되면서 읍내리가 법정동명인 읍내동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행정동인 당진 1동에 속하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읍내동은 본래 당진군 군내면(郡內面)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군내면 성내리(城內里), 동문리(東門里), 남문리(南門里), 북문리(北門里), 서문리(西門里) 일부, 교동(校洞), 무수동(無愁洞)을 병합해 당진군청이 있는 시내이므로 읍내리(邑內里)라 하여 당진군 이배면에 편입하였다. 이배면은 1928년 당진면으로 변경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당진읍으로 승격되었다. 2012년 1월 1일 당진군이 당진시로 승격되어 당진시 읍내동으로 개편되었다.
[자연환경]
읍내동은 당진천의 천변 충적지에 시가지가 들어서 평평한 저지대를 형성하였다. 옛 군청 뒤쪽만 얕은 산으로 이루어져 아후산성이 있었다. 아후산성과 남산을 둘러싸고 당진읍성이 있었다. 당진읍성은 동서남북에 4개 성문이 있었으나 현재 대부분이 교란되어 아후산성 주변에 큰 성돌만 몇 개 보일 뿐이다. 수령 800년 된 은행나무가 천주교회 마당에 있다.
[자연 마을]
읍내동에는 동문안, 교동, 무수동, 계성동, 신시장, 구시장, 구우시장, 대차골, 성안, 북문밖, 새마을, 청룡뿌리, 선마을, 남문리, 서문리, 남산골, 다락골, 목사리, 설성, 천주교말의 20개 자연부락이 있다.
동문안[東門內]은 옛 당진군 군내면 동문리 지역으로, 당진읍성의 동문 안쪽에 있는 마을이며, 동문리라고도 부른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의 당진현 성곽 조에 '현성석성주 일천구백오십사척 유문내유이정 세종이십이년 소책(縣城石城周一千九百五十四尺有門內有二井世宗二十二年所策)'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진읍성은 1440년(세종 22)에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954자, 높이가 8자이며, 동서남북 4개 대문에 우물이 2개가 있었다. 교동(校洞)은 옛 당진군 군내면 교동 지역으로, 당진 향교가 있었기에 ‘교동’이라 했다. 향교촌, 생교말, 향교말 등으로도 불린다. 현재도 당진 초등학교 옆에 하마비(下馬碑)와 함께 당진 향교가 잘 보존되어 있다.
무수동(無愁洞)은 원래 당진군 군내면 무수동 지역으로, 교동 남쪽 아래에 있는 마을이며, 무시울이라고도 한다. 마을에 있는 안산이 천인 무수형(天人舞袖形)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움집을 짓고 5살 먹은 아들과 어렵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승려가 나타나서 동냥을 주었다. 이에 고맙게 여긴 승려가 명당자리를 알려 주고 여기에 묘를 쓰면 부자가 된다고 하며, 묘비와 상석은 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춤추는 형국이라 상석을 하면 무거워서 중이 춤을 못 추기 때문이다. 후에 그대로 하니 부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무수동에 8부자가 생겼다고 한다. 계성동(鷄城洞)은 읍내 동쪽 당진읍성 밖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덕대골이었는데 그 말이 흉해서 '닥재'로 변하여 신라의 계림(鷄林)을 연상시키는 '닭재', 즉 '계성(鷄城)'으로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진읍성이 반달 같았으므로 달[月]성이 변해서 '닭성'이 되고 이것이 한자 표기로 ‘계성동(鷄城洞)’으로 된 것 같다. 신시장(新市場)은 읍내 남쪽에 기존 논을 메워 새로 시장을 개설한 지역으로 현재 상설 시장이 있다. 구시장(舊市場)은 신시장으로 이사 오기 전의 옛 상설 시장 지역이다. 구우시장(舊牛市場)은 예전에 우시장이 서던 당진천 변의 남쪽 지역인데, 지금은 없어지고 당진읍사무소와 군민 회관이 들어섰다가 당진시가 되면서 현재는 당진 2동 사무소가 입주하고 있다. 대차골[待車谷]은 대작골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며, 남산의 남쪽 밑에 있는 마을로 조선 시대 역마(驛馬)의 수레를 이곳에 머물게 했다 한다. 성안[城內]은 옛 당진군 군내면 성내리 지역으로 당진읍성 안쪽, 즉 읍내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북문밖(北門-)은 옛 당진군 군내면 북문리 지역으로, 1440년에 축조된 당진읍성의 북문 밖에 해당된다. 당진읍성의 일부는 현재도 읍내리에 성돌이 남아 있다. 북문동이라고도 한다.
새마을은 신시장 남쪽 당진천 변에 새로 형성된 마을로 집의 형태가 같은 집들이 두 줄로 있다. 청룡뿌리는 순성 가는 도로와 당진동 외곽도로가 만나는 사거리에 약간 못 미쳐에 있는 마을로, 산모퉁이가 쭉 나와 있는데 이것을 '청룡뿌리'라고 하는 데서 유래했다. 예전에 사슴집이 있던 부근이다. 선마을은 당진 신시장에서 면천 가는 도로 가운데 당진천에 놓여 있는 당진 4교 부근 마을이다. 남문리(南門里)는 옛 당진군 군내면 남문리 지역으로 당진읍성의 남문이 있던 지역의 마을을 말한다. 남문거리, 남문동 등으로도 불린다. 서문리(西門里)는 옛 당진군 군내면 서문리 지역으로, 당진읍성의 서문이 있던 마을이다. 남산골(南山-)은 남산(南山) 밑에 있는 마을이다. 남산에는 상록탑, 정자, 활터 등이 있으며 남산 공원으로 가꾸어져 있다. 다락골[樓洞]은 목사리 서쪽에 있던 마을로 옛날에는 '달'이 산을 표시했는데, 산속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라 한다. 목사리(項沙里)는 옛날 바닷물이 당진천을 역류하여 현재의 축협 사료 공장 부근까지 들어올 때 고기잡는 살을 매어 두던 곳으로 옛날에는 사람처럼 앉아서 살을 쳐다보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주민들이 깨뜨려서 주춧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설성(雪城)은 옛 설성 농업학교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읍성 안쪽에 해당된다. '설성'은 읍성를 말한다. '설성'은 이성계가 무학 대사에게 도성을 쌓을려고 하는데, 어떤 곳에다 쌓아야 되느냐고 묻자, 무학 대사가 "눈이 온 뒤에 눈이 녹은 곳에다 성을 쌓으면 된다."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천주교말[天主敎村]은 옛 당진군청 뒤쪽 천주교회가 있는 마을이다. 성당촌(聖堂村)이라고도 말한다. 옛 당진 객사 터 겸 보통학교 터로 아주 오래된 둘레가 다섯 아름 되는 성당 은행나무가 있다.
[현황]
2016년 현재 면적은 2.292㎢이고 인구는 10,594세대에 총 2만 4019명[남자 1만 2528명, 여자는 1만 1491명]으로 당진시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다. 당진시의 중심 지역으로 경찰서, 우체국, 보건소 등 각종 공공 기관과 초중고등학교, 상가, 학원들이 밀집되어 있다. 옛 당진읍성을 중심으로 한 마을이라 자연 부락에 ‘서문’, ‘동문안’, ‘성안’, ‘북문밖’, ‘남문’ 등의 명칭이 보인다. 교동(校洞)에 1406년에 창건되었다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40호인 당진 향교가 있다. 상록탑이 세워진 남산 공원이 마을에 있다. 북문 2리, 계성 2리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고, 중앙리에는 당진 신시장이 개설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