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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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緖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Stone for Gu Seo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남석 |
건립 시기/일시 | 1926년 - 구서 신도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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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구서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산80 |
원소재지 | 구서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산80 |
성격 | 신도비 |
관련 인물 | 구서(具緖)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210㎝[전체 높이]|[비신 가로 약 61㎝×세로 163㎝×두께 30㎝] |
소유자 | 능성 구씨 대종회 |
관리자 | 능성 구씨 대종회 |
[정의]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 구서의 신도비.
[개설]
구서(具緖)의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에 세거지를 형성한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 면성 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의 고손자이다.
신도비의 내용에 따르면, 구서는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조숙하였고, 어머니가 사망하자 슬픔과 예절로써 장례를 치르고 제수를 손수 만들어 마을에서는 효자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구서는 벼슬이 자헌대부 병조 판서, 한성 부윤에 이르렀고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에 있다.
구서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아들 구문신(具文信)은 좌리공신(佐理功臣) 자헌대부 병조 판서를 지냈다. 둘째 아들은 은산 현감(殷山縣監)을 지낸 구문정(具文靖)이다. 셋째 아들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사(兵使) 구문로(具文老)인데,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으며 ‘흑면 장군(黑面將軍)’으로 불렸다.
[건립 경위]
구서 신도비는 아들인 구문로의 신도비와 함께 1926년 4월에 세웠다. 효릉 참봉(孝陵參奉) 구연창(具然敞)이 글을 짓고, 구한서(具翰書)가 글씨를 썼다. 또한 권중하(權重夏)가 두전(頭篆)[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 가며 쓴 전자(篆字)]을 썼다.
[위치]
구서 신도비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산80에 있다.
[형태]
신도비는 화강석 직사각형 기단 위에 오석 비신(碑身)[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을 세웠다. 비신의 크기는 가로 약 61㎝, 세로 163㎝, 두께 30㎝이다. 비신 위에는 화강석 지붕돌을 올렸다. 지붕돌을 포함한 전체 높이는 210㎝이다.
[금석문]
구서 신도비의 비명은 ‘자헌대부 병조 판서 구공 신도비명(資憲大夫兵曹判書具公神道碑銘)’이다. 신도비의 옆면과 뒷면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현황]
구서의 묘소 앞에 있는 묘비는 중앙이 솟아오른 독특한 형태이다. 하지만 시기가 오래되어 글씨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식되었다. 신도비도 아랫부분은 많이 손상되어 글씨 확인이 안 된다. 원래 구서 신도비와 구문로 신도비는 같은 마을 안에서도 다른 곳에 있었다. 능성 구씨 신암 종중에서는 2003년 10월 구서를 중심으로 묘소와 신도비를 한곳으로 모으고 묘역을 정화하였으며 음력 3월 3일에 시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