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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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合德堤-唐津農業-象徵 |
영어공식명칭 | Hapdeok Embankment-Symbol of Dangjin Agriculture |
이칭/별칭 | 연호(蓮湖),연제(蓮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학로 |
[정의]
전국 최고의 미곡 생산지 당진과 당진 농업의 상징 합덕제.
[개설]
당진시는 전국 최대의 미곡 생산지이다. 당진시의 벼 재배 면적은 20,246㏊로 전국 네 번째에 불과하지만, 미곡 생산량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연간 12만톤 정도의 쌀을 매년 생산하고 있다. 단위 면적[10a]당 생산량은 단보당 579㎏으로 전국 최고 수준이다. 이는 삽교천 유역의 토질이 비옥하여 지력이 높고 미곡생산에 필수적인 저수시설과 농가의 재배기술 향상이 결합되면서 이어진 결과이다. 이렇게 당진시가 전국 최고의 미곡 생산지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전통적으로 비산비야의 평야 지대에서 미곡 생산에 적합한 기후와 토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진 일대 삽교천 유역은 일찍이 고대 시대부터 미곡 생산에 적합한 지역으로 드넓은 평야만큼 제방을 쌓고 저수지를 축조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미곡 생산에 필수적인 저수지는 당진 지역 곳곳에 생겨났고, 생겨난 저수지만큼 당진 농업은 발전하였다. 당진의 대표적인 제방으로는 합덕제, 백미제, 오봉제 등이 있다. 그중 합덕제는 그 역사가 깊고, 모든 제방의 시초가 되었다. 합덕제가 생겨남으로써 당진 농업은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당진 농업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당진의 농업은 합덕제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합덕제를 통해 발전했으며, 합덕제는 곧 당진 농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진 합덕제의 연원]
합덕제의 소재지는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였다. 신라 말 후백제의 견훤이 성동산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말먹이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방죽을 쌓은 것이 합덕제의 기원이라는 전설이 전하고 있지만 정확히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백제 부흥 전쟁 당시 풍왕이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천도하려고 피성 주변의 상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동남쪽의 ‘벽골’이라는 거대한 제방을 언급한 『일본서기』 기록이 있다. ‘벽골’은 지금처럼 일반 명사가 아니고 벼가 많이 나는 곳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이기 때문에 합덕제의 기원은 예상보다 훨씬 연대가 앞서 건설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듯 합덕제는 고대부터 주변 농경지에 필요한 물을 대는 역할을 하였는데 예당저수지의 물이 수리에 이용되기 시작한 1964년까지 저수지로 이용되었다. 합덕제의 제원을 살펴보면 제방 전체 길이 1,771m, 둘레 8㎞, 평지로부터 높이 7~8m, 총 저수 면적 175만㎡에 이르는 거대한 저수지로 조선 시대 당시 김제의 벽골제, 연안 남대지와 더불어 조선 3대 방죽으로 유명했다. 합덕제는 제방이 마치 사행천처럼 구불구불하게 축조되어 있는데, 김제의 벽골제나 오늘날 저수지와 같은 일직선형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합덕제의 관개 면적은 무려 726정보나 되어 합덕제 아래 합덕리, 옥금리, 도리, 신석리, 대합덕리, 점원리 등의 6개 마을 넓은 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다. 합덕제에는 제방 아래 6개 마을에 관개하기 위한 수문이 모두 9개소가 있었다. 상흑 지역의 논에 관개하는 상흑 수문, 하흑 지역 논에 관개하는 하흑 수문, 고평 지역 논에 관개하는 고평 수문, 옥금 지역 논에 관개하는 옥금 수문, 도리 지역 논에 관계하는 도리 수문, 합덕리 지역에 관개하는 합덕리 수문, 대합덕리 지역 및 홍수기에 객수를 배수하는 외수문 등이 있었다. 그러나 옛 수문은 현재는 그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수문은 홍수 때 물을 빼는 기능과 대합덕리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기능을 하는 외수문만이 남아 있다. 외수문은 ‘왜목’이라 부르거나 여수토(餘水吐)라고도 칭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수문은 서기 1925년 축조된 것이다. 원래 외수문의 위치는 대합덕리 방죽 옆 연제 비석군 옆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25년 현 위치로 자리가 변경되었다. 또한 모든 수문의 축조 재료는 원래 생나무를 땅에 박아 썼는데 파도가 일어나 제방이 유실되자 일제 강점기에 석재로, 그 다음에 시멘트 콘크리트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현재 합덕제는 석축한 제방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쌓은 것이라고 마을 주민 이형진씨는 증언하였지만, 정확히는 1913년에 중수되었다고 연제 석축비에 기록되어 있고, 1956~1959년까지 중수 공사를 통해 석축 방죽 공사를 벌였던 것이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최근에는 1997년부터 2008년까지 충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합덕제의 역사적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발굴 조사를 하였고 합덕제의 모든 수문의 위치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3대 방죽, 조선 농업의 상징 합덕제]
합덕제는 조선 3대 방죽이라는 수사에 걸맞게 당진을 넘어 조선 농업의 상징이었다. 산업의 주요 기반이 농업에 한정되어 있던 조선 사회에서 쌀 생산에 필수적인 저수지는 조선 사회를 지탱하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조선 말기 합덕제의 몽리(蒙利)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 소출은 2만 2300석이 넘었다. 1893년 인천항의 미곡 수출 총량이 6만 석 정도였는데 이것의 40%, 이운사(利運社) 선가미 1만 4534석의 2배에 달하는 쌀을 생산했던 것이다. 이렇듯 합덕제는 소들·강문평야의 절반, 몽리 지역 6개 마을 농민의 생명줄이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1652년에 효종이 왕명으로 이곳 합덕지를 궁중 세력가가 점유하지 못하도록 관리책임을 엄중히 지시하는 등 합덕제를 특별히 관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특권층들은 합덕제를 사적으로 점유하여 독점하려는 마음을 언제나 품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이 발생하였고, 역사적 사건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조선 말기 1893년 있었던 합덕 농민 항쟁이다. 합덕 농민 항쟁은 합덕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당시 합덕제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던 자는 합덕제 수리 계장을 맡고 있던 전 전라 병사 이정규였다. 이정규는 덕산 군수 시절부터 합덕제 인근에 별장을 짓고 살았는데 전라 병사를 사직한 이후에는 합덕제 수리 계장을 맡아 주변 농민들을 상대로 온갖 토색질을 자행하였다. 이정규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합덕제 얕은 곳을 메워 논을 만들고, 제방을 쌓아 수세를 걷었다. 합덕제가 메워지면 나머지 논의 유일한 수원(水源)인 합덕제의 물이 그만큼 줄어들어 농민의 생계가 위협 받는다. 이렇게 이정규는 합덕제를 관리하는 수리 계장 자리를 악용하여 농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았다. 이에 견디다 못한 인근 6개 마을 농민들은 이정규의 죄상을 홍주 목사에게 호소하여 해결하기로 하였다. 동학 접주이기도 한 옥금리(玉琴里) 나성뢰(羅聖雷)와 창리(倉里) 주민 이영택(李永鐸) 등이 앞장섰다. 합덕 농민들은 이정규의 죄상을 적은 혈원록(血怨錄)을 써서 800여 명의 농민들이 홍주 목사에게 찾아가 등장(等狀)을 했다. 그러나 홍주 목사 김기수는 조정에서 할 일이라며 아무 조치 없이 농민들을 돌려보냈다. 합덕 농민들이 등장하러 홍주 관아에 몰려갔다는 사실을 안 이정규는 홍주 목사에게 등장 간 농민들을 모두 죽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 편지는 홍주 관아에 전달되기 전에 농민들이 먼저 보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징을 쳐 합덕제 아래 용충에 모였고, 그날 밤 횃불을 들고 이정규와 그 일가의 집 12채를 불태웠다. 이렇게 시작된 합덕 농민들의 봉기는 내포 지방 동학 농민 혁명의 전조가 되었다. 이후 합덕제를 둘러싼 역사적인 사건인 합덕 농민 봉기는 동학 농민 혁명 당시 합덕 전투로 이어졌다. 1894년 10월 16일부터 21일까지 합덕제를 사이에 두고 동학농민군과 홍주 관군과의 전투는 무려 6일간이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동학 농민군이 홍주 관군을 이기지 못하고 패했지만 합덕제를 둘러싼 합덕 농민들의 항쟁은 합덕제와 함께 당진 농민들의 자부심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사건당시 충청도 관찰사가 조정에 올린 『충청도 관찰사 조장계(忠淸道觀察使趙狀啓)』와 당시 면천에서 귀양 살던 김윤식의 기록인 『속음청사(續陰靑史)』, 홍주 목사 이승우의 막장으로 있던 홍건이 쓴 『홍양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학과 전설, 농업 문화의 보고 합덕제]
합덕제는 문학과 전설, 농업 문화의 보고이기도 하다. 합덕제는 연호(蓮湖), 연제(蓮堤)라고도 불렸다. 그 이유는 여름이면 연꽃이 합덕제 넓은 호수에 만발하여, 그 광경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꽃으로 만발한 합덕제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꼭 가 봐야 하는 곳이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가면 염라대왕이 "생전에 합덕 방죽에 가 보았느냐?"라고 물어볼 때 "예 가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아니요. 가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생전에 무엇 하였기에 그 유명한 합덕 방죽도 구경 못했느냐."라고 꾸지람을 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한 합덕제에는 남생이가 많았는데, 날이 좋으면 남생이들이 제방에 늘어 앉아 햇볕을 쪼였다고 한다. 그 모습이 장관이어서 사람들이 줄지어 있으면 "합덕 방죽 줄남생이 앉은 듯하다."는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합덕제에는 용충이라는 샘이 있었다. 용충은 방죽 밑 중간쯤에 있었는데, 얼마나 물이 잘 나는지 이른바 7년 가뭄에도 이 용충물은 마르지 않았다 한다. 용충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용충은 얼마나 수심이 깊었던지 명주꾸리 1개를 다 내려도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다. 지난 1950년대 이곳 주민들이 용충의 샘물이 얼마나 용출되나 실험하기 위하여 5마력 발동기 3대로 여러 시간 물을 퍼냈으나 용출되는 샘물을 고갈시키지는 못했다고 한다. 또한 용충은 신비하게도 물빛이 매일 세 번씩 변색되었는데 아침에는 푸른색, 점심때는 붉은색, 저녁때엔 누런색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반복되던 색이 어느날엔 흰색과 검은색이 추가되기도 했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용추의 물빛이 변하는 이유는 용충에 용이 한마리 살고 있는데, 용의 꼬리는 성동리 토미산 쪽에 있고 용의 머리는 용충에 와 있으므로 용이 물을 먹었다 토해 놓았다 하여 물빛이 변하는 것이란 전설과 성동리에 용샘이 있었는데 용의 머리는 용샘에 두고 꼬리는 용충에 두고 있어 용이 꼬리로 조화를 부려 용충의 물빛이 여러 번 변색된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유명했던 용충은 1980년대 후반기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유는 행정 당국의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용충을 합덕읍 쓰레기장으로 지정하여 용충을 쓰레기로 완전히 메워 버리고, 그 위에 흙을 덮은 후 논으로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합덕제 한복판에는 호중도라는 섬이 있었다. 이 섬은 원래부터 있었던 섬이 아니고, 지난 1939년에 준설 작업을 하면서 생겨난 인공섬이었다. 1939년 가뭄이 얼마나 심했는지 무려 16개월이나 계속되었는데 이때 합덕제가 바짝 말라서 바닥을 드러냈다. 마을 주민들은 앞으로 저수량을 높이기 위해 저수지 바닥에 쌓인 토사를 농기구를 이용하여 지게로 파내어 호수 중앙에 쌓아 놓아 일종의 인공섬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조성된 호중도는 조성된 지 약 30년 만에 합덕제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진 농업의 미래, 합덕제]
합덕제는 1964년 예당저수지 물이 합덕제를 대신하게 되면서 수리 사업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수리 기능을 상실한 합덕제는 소유권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합덕제 토지 소유자와 몽리 지역 주민들 간의 소유권 분쟁은 청산 위원회를 구성한 주민들의 승소로 장기적인 소유권 분쟁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몽리 주민들에게 보상금을 주고 소유권 분쟁을 마무리 지은 토지 소유권자들은 합덕제를 메워 논으로 개간하였다. 이것으로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합덕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진시는 제철 산업의 발달과 개발로 급속히 변화하는 공업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도시이기도 하다. 2016년 기준으로 당진시의 농가 수는 총 1만 3580가구에 농업인 수는 3만 0,498명이다. 경지 면적은 총 6억 6447만 7962.60㎡인데, 밭이 7031만 5882.90㎡이고, 논이 2억 464만 4875.10㎡, 임야가 2억 4558만 2675.20㎡이다. 이 중에서 논의 경우 78%가 수리 안전답으로 쌀농사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쌀 생산에 필요한 농업 기반 시설을 완비하게 된 것은 합덕제와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일찍부터 ‘합덕제’라는 수리 시설이 존재함으로써 당진 지역은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고, 자연스럽게 인근 지역에도 수리 시설 건설의 필요성을 일깨우게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합덕제는 당진 농업의 시원이자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고, 오랜 역사 속에서 당진 농업의 성지로 기억되고 있다. 합덕제에는 당진 농업의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으며, 당진 농업의 미래가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