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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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愚山里安東權氏世居地 |
영어공식명칭 | Ancestral Village of Andong Gwon Clan in Usan-ri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우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남석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우산리에 있는 안동 권씨 세거지.
[개설]
안동권씨의 시조는 권행(權幸)이다. 권행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삼한 벽상 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에 오르고 태사(太師)에 제수되었다. 안동에는 ‘태사묘(太師廟)’라 하여 3명의 태사를 배향하고 있다. 그들은 안동권씨의 시조인 권행, 안동 김씨의 시조인 김선평(金宣平), 안동 장씨의 시조인 장정필(張貞弼)이다. 모두 당시대의 인물로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인물들이다.
안동권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벌열 가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9세손 권융(權融)에 이르러 문하시중을 지냈고 권융의 아들인 권인가(權仁可)가 시중을 지냈다. 본격적인 중앙 진출은 10세손 권수평(權守平)부터이다. 또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 인물은 개국 공신인 권근(權近), 세조 때의 정난공신인 권람(權擥), 임진왜란 당시의 명장 권율(權慄)을 들 수 있다.
안동권씨는 고려와 조선에 걸쳐 재상급 41인, 경신(卿臣)이라 하여 현재의 장관급 108인, 조선 시대 대제학 7인을 배출하였다. 그 외에 봉군된 인물이 70인이며 시호를 받은 인물은 60인에 달한다. 또한 서원에 배향된 인물이 62인이며 각종 공신에 책록된 인물은 87인에 이른다. 그 외에 충절로 이름 높은 인물이 74인, 효행으로 이름 높은 사람은 63인이다.
[명칭 유래]
당진시 정미면 하성리와 우산리에는 안동권씨 입향조인 권여경(權餘慶)[1565~1639]과 관련된 지명이 두 군데 있다. 한 곳은 하성리에 있는 반정재[半亭峙]다. 이곳은 권여경이 지은 반월정(半月亭)이 있었기에 지어진 명칭이다. 『당진군지』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권여경이 이곳에 와서 99칸 집을 짓고 살았는데 하루는 그 집의 노비가 도망갔다. 권여경은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가 제주도에 숨어 있는 노비를 잡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노비는 또다시 도망을 갔는데 그 전에 집에 불을 질렀다 한다. 불이 반월정에 붙자 불길은 수 십리 밖에서도 보였고 기왓장이 불에 튀어 멀리 날아갔다. 그중에 『남화경(南華經)』이란 책이 인근 정미면 덕삼리의 간대산(艮大山)까지 날아갔는데 후손이 이를 수습해 얼마 전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또 한 곳은 반정재에서 정미면 우산리 방향으로 가면, 우무산을 넘어 대호지면 마중리로 가는 고개가 있다. 이곳을 ‘중고개’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는 권여경이 반월정을 짓고 살 때, 고개를 넘어오던 승려가 근방의 아이들에게 “권병사 댁이 어디냐, 저 커다란 집이 권병사 댁인가” 하면서 묻고 또 물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형성 및 변천]
입향조인 권행의 25세손 권여경의 자는 선응(善應)이다. 아버지는 권곡(權鵠)이다. 권곡은 3도 병사(三道兵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다. 권여경이 활동하던 17세기 전반기는 정치적 격동기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에 권여경은 서울을 벗어나 한적한 시골로 낙향을 하기로 하고 두 동서와 함께 유람을 하게 되었다. 큰 동서는 청주 한씨이며 작은 동서는 전의 이씨였다. 그들은 우연히 정미면을 지나면서 최적의 명당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청주 한씨는 서산시 성연면 평리(坪里)에 정착하였고, 전의 이씨는 정미면 봉성리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권여경은 정미면 하성리에 집터를 마련하였다. 이로써 안동권씨는 ‘염솔 권씨’ 혹은 ‘해미 권씨’로 불리게 되었다.
권여경의 후손은 정미면 하성리 부근의 우산리를 중심으로 16대, 400년 정도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고관대작을 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우산리를 중심으로 유유자적하면서 유학(儒學)과 문한(文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권취선(權冣善)[1814~1892]이다.
권취선의 호는 동창재(東蒼齋), 사도재(思道齋), 송산 거사(松山居士)이다. 효행이 지극하고 대 문장가였다. 아들로는 형(瀅), 식(湜), 호(浩), 발(浡), 심(沈) 등의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학식이 뛰어났다. 그들은 모두 12명의 아들을 두었다. 달상(達相), 필상(弼相), 일상(日相), 치상(致相), 택상(宅相), 우상(雨相), 혜상(惠相), 무상(懋相), 덕상(悳相), 철상(喆相), 긍상(兢相), 기상(麒相) 등이 그들인데 이른바 12종형제라고 불렀다. 특이하게도 이들은 모두 문한에 뛰어나 도무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만사에 훤하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마다 그들을 찾아 해결하였고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이들 형제를 ‘염솔 무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연환경]
당진에서 정미면 승산리 사거리를 거쳐 서산으로 넘어가는 길에 정미면 우산리가 있다. 산 정상과 허리에 고압선 철탑이 많아 아찔한데 우산리, 산성리를 지나면서는 훨씬 덜하다. 지형적으로 적당한 산들이 사방을 막아주며 널찍한 구릉지가 있고 마을 중앙에 염솔천이 흐른다. 이곳이 바로 ‘3재 8난’을 면케 해준다는,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인 염솔 지역이다. 3재란 풍재(風災), 화재(火災), 수재(水災)를 말하며 8난이란 8가지의 삶의 어려움[배고픔, 목마름, 추위, 더위, 물, 불, 칼, 병란]을 지칭한다.
염솔 지역은 우산리를 비롯하여 모두 6개의 동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형적으로 둥그렇게 모아져 있다. 염솔천의 남서쪽부터 산성리(山城里), 하성리(下城里), 우산리(愚山里)가 있고 염솔천 동편으로는 덕삼리(德三里), 봉성리(鳳城里), 매방리(梅坊里)가 있다. 이들 마을의 외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성리의 자모산[256m]을 중심으로 우산리 쪽으로는 우무산[158m], 그리고 동미산이라는 야산이 도산리와의 경계로 우산리의 북쪽을 막아 준다. 덕삼리는 간대산[174m]으로 넘어가고 봉성리의 안국산, 봉화산[205m]으로 이어진다.
결국 높지도 않고 또 낮지도 않은 산들이 빙 둘러싸여 매우 안온하며 마을끼리도 서로 멀지 않다. 하성리에 있으면 좌우에 산성리, 우산리를 볼 수 있으며 냇가 건너 덕삼리와 봉성리, 매방리를 두루 살필 수 있다.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매우 편안한 환경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현황]
안동권씨 집성촌은 염솔 6개리 중 정미면 우산리를 중심으로 하성리까지 형성되어 있다. 이들은 ‘안동권씨 병사공파(兵使公派)’라 부른다. 입향조 권여경이 시조인 권행의 25세손인데, 현재 41세까지 내려왔기에 16대가 계승되었고 기간은 400년에 이른다. 예전엔 거의 전주민이 안동권씨였다. 하지만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대도시로 나갔고 현재는 많이 거주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2016년 현재 우산리의 경우 총 40여 호 가운데 7호가 안동권씨이고, 하성리의 경우도 총 30여 호 중 단 5호만이 안동권씨이다. 그 외에 산성리에 한 집, 덕삼리에 한 집 등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