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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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文璟 |
이칭/별칭 | 능양위(綾陽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종현 |
혼인 시기/일시 | 1501년 - 구문경 연산군의 딸 휘순 공주와 혼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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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06년 - 구문경 휘순 공주와 이혼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08년 - 구문경 휘순 공주와 재결합 |
묘소|단소 | 연산군 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
성격 | 인척 |
성별 | 남 |
본관 | 능성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소가 있는 연산군의 사위.
[가계]
본관은 능성(綾城). 구수영(具壽永)의 5남 5녀 중 넷째 아들이다. 증조할아버지 구양(具揚)은 공주 목사를 역임하였으며, 구양의 장남 구치관(具致寬)이 세조 즉위 시 좌익공신 3등, 성종 대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녹훈된 바 있으며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할아버지 구치홍(具致洪)은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 당시 종사관으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후 강릉 대도호부사,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호양(胡襄)이다.
아버지 구수영은 12세 때 세종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사위가 되어 세조로부터 선략장군 부호군(宣略將軍副護軍)을 제수받았으며, 성종 즉위 후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구수영은 연산군 즉위 후 판의금부사, 장악원 제조, 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으나, 사위인 임희재(任熙載)와 안양군(安陽君)이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임희재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갑자사화에 죽임을 당하였고, 안양군은 성종과 귀인 정씨의 아들로 연산군에 의해 사사되었다. 이후 구수영은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다.
[활동 사항]
구문경(具文璟)은 1501년(연산군 7) 연산군의 딸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부마가 되었고, 같은 해 7월에 능양위(綾陽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휘순 공주가 출가할 집을 지어 주도록 하였으며, 이후에도 평시서(平市署)가 휘순 공주의 집을 압박하자 그곳을 공주에게 주고 평시서를 옮기도록 한 바 있다. 중종반정 후 연산군이 폐위되자 구문경과 공주의 직첩을 거두고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또한 연산군 재위 시 공주에게 사급(賜給)하였던 물건 및 가사(家舍)와 전민(田民)을 아울러 관에 귀속시키도록 하였는데, 구문경의 집은 중종반정의 공신 박원종(朴元宗)에게 넘어갔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던 아버지 구수영은 조정에 연산군과 절혼(絶婚)할 것을 청하여 구문경과 공주는 이혼하게 되었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구수영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바 있으며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구문경으로 하여금 절혼하게 했다고 비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08년 정광필(鄭光弼)은 경연에서 구문경의 이혼이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였으며, 이어 유순(柳洵) 또한 구문경 부부를 다시 합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중종은 구문경 부부를 다시 합하도록 하였으며, 반정 당시 가사를 모두 몰수하였으므로 빈 집을 사급하여 주거나 그 값을 계산하여 면포를 주도록 하였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실린 구수영의 묘지명(墓誌銘)에는 구문경에 대해서 ‘먼저 죽었다’고 되어 있어 구수영이 사망한 1523년(중종 18) 이전에 세상을 떠난 것은 알겠으나, 자세한 사망 시기와 이유는 알 수 없다.
[묘소]
우이 계곡 입구에서 방학 사거리 방향으로 방학로를 따라가면 고개를 넘어서기 전 좌측에 연산군 묘가 위치해 있다. 묘역에는 총 5기의 묘가 있는데, 최상단에 연산군과 거창 군부인 신씨의 묘가 조성되어 있고, 그 하단에 의정 궁주(義貞宮主)의 묘가 있으며, 최하단에 구문경과 휘순 공주의 묘가 쌍분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묘표 2기, 혼유석 2기, 상석 2기, 향로석, 문인석 등의 석물과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망주석, 장명등 등이 갖추어져 있다. 묘표는 운수형으로 ‘능성 구공지묘(綾城具公之墓)’, ‘전주 이씨지묘(全州李氏之墓)’라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