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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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溵 |
이칭/별칭 | 치호(稚浩),첨재(瞻齋),충목(忠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로 278-3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아 |
출생 시기/일시 | 1722년 - 이은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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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40년 - 이은 진사시 합격 |
몰년 시기/일시 | 1781년 - 이은 졸 |
묘소|단소 | 이은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9-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덕수(德水) |
대표 관직 | 좌의정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 증조할아버지는 이광하(李光夏)이고, 할아버지는 이집(李㙫)이다. 아버지는 병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며, 어머니는 민진원(閔鎭遠)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은(李溵)[1722~1781]은 1740년(영조 16)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음보로 남평 현감을 지냈다. 1759년(영조 35)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에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이어서 이조참판·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단종을 추숭하는 데 힘썼다. 1766년(영조 42) 강화 유수가 된 이후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무고로 판정되어 직임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이후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도성에 들어와 문안(問安)하지 않아서 삭녕 군수로 좌천되었다가 곧바로 형조참판이 되었다. 1772년(영조 48)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나, 대사헌 정광충(鄭光忠), 대사간 이담(李潭) 등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1775년(영조 51) 영조가 왕세손에게 대리 청정을 명하면서 논란이 일어나자 이은은 판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왕세손에게 대리 청정하는 것을 지지하는 서명선(徐命善)을 도와 이후 정조의 신임을 얻었다. 좌의정과 우의정을 역임하였고, 이후 조영약(趙榮約)에 관한 일로 임금과 대좌할 때 탄핵은 대간이 해야 할 일인데 대신(大臣)으로 이를 하였으므로 체모에 어긋난다고 하여 면직되었다.
1777년(정조 1)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이은은 북경(北京)에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5,020권을 은자(銀子) 2,150냥을 주고 구매하여 가지고 왔다. 그 뒤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군교(軍校)의 일로 어영대장 구선복(具善復)과 다투었다가 파직되었다. 파직 이후 자신을 변호하는 차자(箚子)를 올려 정조의 미움을 사 장연부(長淵府)[현 황해도]에 부처(付處)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영중추부사에 서용되었으며, 1778년(정조 2) 심양 문안 정사(瀋陽問安正使)로 청나라에 가서 건륭제의 어필을 받아왔다. 1780년(정조 4) 좌의정에 올랐고, 정조가 후사가 없음을 염려하는 왕대비의 뜻을 전하여 빈(嬪)의 간택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좌의정에서 면직된 이후 영돈령부사가 되어 도성 문을 관리하였는데, 그 임무에 소홀하였다면서 차자를 올려 죄를 자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덕수 이씨 묘역에 있다. 우이 계곡에서 방학로를 따라 고갯길을 넘어서면 도로 왼쪽에 천주교 공원묘지가 있는데, 덕수 이씨 묘역은 공원묘지 입구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원래 연산군의 부마였던 구엄(具渰)의 토지였으나, 구엄의 외동딸에게 장가든 이필(李泌)에게 상속되었고, 이후 덕수 이씨 묘역으로 조성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조가 자신의 국왕 등극 공을 높이 평가하여 이은의 죽음 직후 홍문관으로 하여금 즉시 시호를 의논하게 하여 충목(忠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