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0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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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寧國寺 |
분야 | 종교/불교,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민아 |
최초 건립지 | 영국사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 1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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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찰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도봉 서원의 자리에 있었던 사찰.
[개설]
현재 도봉 서원이 있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 1동은 이전에 양주(楊洲)에 속하였던 도봉산 영국동(寧國洞)이었다. 이곳에는 원래 영국사(寧國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이 허물어진 터에 도봉 서원을 지었다고 전한다.
[건립 경위 및 변천]
도봉 서원이 지어지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영국사가 언제 건립되었으며, 언제 무슨 이유로 허물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불교 쪽의 문헌을 조사해보아도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도봉 서원이 지어진 것이 1573년(선조 6)이니 이미 그 이전에 사찰이 없어졌을 것이다. 고려 말 이래 숭유 억불 정책을 쓰면서 많은 사찰들이 폐사되었다. 영국사 역시 그 중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활동 사항]
영국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자료가 없고, 다만 몇몇 문인들이 남긴 문집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김수온(金守溫)[1409~1481]의 문집에 실린 「영국사」라는 7언 율시(律詩)를 보면, 당시 도봉산의 계곡 물이 강처럼 힘차게 흐르고 골짜기에는 절이 매우 번성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김수온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도봉산(道峰山) 영국사(靈國寺)」라는 7언 율시는 영국사(寧國寺)와 한자가 다르나 도봉산 영국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앞의 영국사임이 분명하다. “층층의 옛 탑은 부질없이 하얗게 섰고, 동강난 비는 글자 없이 반쯤 퍼렇게 묻혔다.”는 구절에서 영국사가 고찰(古刹)이었으며, 이미 이 시기에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영국동(寧國洞)」과 「차영국동 유거운(次寧國洞幽居韻)」이라는 유희경(劉希慶)[1545~1636]의 7언 절구(絶句) 두 수가 있다. 유희경은 만년에 영국동에 침류대(枕流臺)라는 별장을 짓고 은거하여 많은 문인들과 시를 즐기며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여러 차례 도봉산을 유람하면서 남긴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한시에 영국 서원(寧國書院)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이복과 함께 도봉 서원을 방문하였던 이정귀(李廷龜)[1564~1635]의 「유도봉 서원기(遊道峰書院記)」에서도 도봉 서원을 영국 서원으로 지칭하였다. 이정귀는 조선 중기 한문 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1573년(선조 6)에 창건되어 1592년에 소실되었다가 1608년(선조 41)에 중건된 도봉 서원의 초창기 모습을 실제로 보았던 사람이다. 1582년에 영국 서원에서 글을 읽었다는 기록을 통해 도봉 서원 설립 초기에는 도봉 서원을 영국 서원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오래되고 번성한 사찰이 훼철되고 영국동이라는 지명만 남은 까닭은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관련 문화재나 관련 문물 역시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